무언가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기어이 닿고자 하는 과정
연례 행사처럼 매년 한 차례씩 클래식 음악을 앓는다. 대개 겨울에 그러한데, 올해는 조금 일찍 찾아왔다. <동경과 거짓말> 덕분이다. 이전에 리뷰를 작성했던 <모스크바의 여명>에 이어, 이번에도 클래식 음악을 소재로 한 작품을 하나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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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에델바이스 밀런.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에델바이스는 음악 아래 모든 것이 평등해지는 곳, 리베르타 사립 학원에 편입생으로 입학한다. 원하는 만큼 음악을 누리고 최대한 늦게 집안으로 돌아가고자 엉뚱한 인물을 학원의 후계자로 보고(하려)한 에델바이스는, 자신이 지목한 문제의 인물 비올라가 사실은 총장의 사라진 손자이자 진짜 후계자임을 알게 된다. 그의 음악에 반한 에델바이스는 반쯤 타의와 자의에 의해 그를 대신하여 후계자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괴팍하고 불안정한 천재 비올라에게 햇살 같은(마냥 그렇지만도 않지만) 에델바이스가 스며드는 과정도 인상적이지만 나를 가장 사로잡은 건 간간이 등장하는, 음악을 사랑하고 동경하는 나머지 거기에 닿고자 하는 마음을 다루는 작가의 서술과 연출이었다.
이를테면 여기에서 출발해보자. 22화에서 에델바이스의 형 아이리스는 비올라에게 교수이자 자신의 친구인 필리아와 친하게 지내 달라고 부탁하며 “식사는 생존을 위해서라지만, 즐겁게 한 식사가 유독 오랜시간 기억되고, 결국 삶에 새겨지듯이 자신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도 잊지 않기 위해선 중력 외의 것이 필요한 법”이라고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말이지만 동시에 어째서 예술이 세상에 필요한지에 대한 답 같기도 하다.
무언가를 사랑하노라면 대상을 어떻게든 잘 분석하고 싶어지는 법. 에델바이스의 시선에서 묘사되는 비올라와 카터가 그려내는 음악의 차이도 그러하다. 에델바이스에게 비올라의 음악은 자신을 휩쓸어 높은 곳으로 올려다 놓음으로써 새로운 차원으로 눈을 틔워주는 거센 파도라면, 에델바이스가 학원에 오기 이전부터 가짜 후계자 행세를 하고 있었던 카터의 음악은 모든 요소를 하나하나 섬세하게 조율하여 듣는 사람을 소름 끼치게 하는 정교한 물의 흐름으로 비유된다. 작가의 진심과 연출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38화는 많은 독자에게 백미로 꼽히기도 한다.
<동경과 거짓말> 38화
어디선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여러 번 보고, 평론하고, 결국 만든다고 했던가. 작품은 이제 막 음악이라는 세계에 발을 내디딘 에델바이스의 시점에서 그것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데 이어 그가 음악에 기어이 닿는 구체적인 과정을 차례로 담아낸다. 예를 들어 산이나 비올라와 달리 자신은 합주 연습에서 전혀 의견을 내지 못하자 에델바이스는 교수인 필리아를 찾아가 수업을 청하는데, 약하게 연주한다거나 특정 부분을 강조하면 좋을 것 같다고만 말하는 에델바이스에게 필리아는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그걸 위해서. 음악은 소리지만, 곡의 ‘이미지’를 잡는다면 상상이 훨씬 편할 거야. (중략) 이런 이상향의 해상도가 뚜렷할수록, 또 표현할 방법을 다양하게 알수록 할 줄 아는 게 늘어나.”(40화)
필리아 교수의 이 말은 음악을 함에 있어 선명한 목표를 갖는 것과 그것을 구현하는 기술, 두 가지의 중요성을 모두 지적하는데, 이러한 인식은 56화에서 합주제의 시작을 알리는 학원 위원장의 축사나 63화에서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비올라가 지닌 강직함과 성실함을 꼽는 카터의 묘사 등 작품에서 반복하여 변주된다. 그러니까 필리아 교수나 위원장만이 아니라 결국 작가에게도 음악이란 실재를 지닌 악기와 기술로써 연주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상(象)을 청중 앞에 끌어오는 작업을 의미할 테다.
<동경과 거짓말> 69화
주인공 에델바이스는 아직은 둘 중 전자에 충실한 행보를 보인다. 갓 첼로를 잡고, 순수한 즐거움을 느끼며, 기억 속 히아신스의 음악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총장의 음악을 좇는다. 최신 회차에서 에델바이스는 부단한 노력 끝에 산과 비올라의 연주에 자신을 성공적으로 녹여내고 그들에게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다음은 뭘까? 아마도 에델바이스가“타인의 갈고 닦은 연주에 자신의 감정을 불어넣는 것”(69화)을 넘어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 차례일 거 같다. 물론 비올라와 카터에 이어 에델바이스의 연주는 천둥이 섞인 비로 비유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필리아의 도움을 받아 총장의 연주를 흉내 낸 것이었으니 온전히 에델바이스만의 연주라고 보기는 어려울 테다. 카터와 비올라와 함께하는 합주 연습에서 에델바이스가 자신만의 음악을 찾아가길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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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과 거짓말>은 8월 말에 업로드된 70화를 기점으로 두 달간 휴재에 들어간다. 혹시 관심이 생겼다면 여유가 생긴 틈을 타 정주행을 하며 복귀를 기다려도 좋겠다. 이쯤 글을 마무리하며, 이번에도 책을 한 권 추천한다. 임승수의 에세이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는 비전공자인 저자가 피아노 연주를 취미로 삼게 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악기를 연주하게 되었다는 데 대한 피상적인 감상을 넘어 여러 버전의 악보를 구하고 곡을 낱낱이 분석하고 자신이 원하는 효과를 내기 위해 기술을 단련하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어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