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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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명과 동질감의 흡인력 – <썩은 핑크의 법칙>

썩은 핑크의 법칙 (글, 그림 : 힙합신선 / 네이버 웹툰 연재) 리뷰

2024-09-27 김민서

명명과 동질감의 흡인력 – <썩은 핑크의 법칙>

  "달이 빛난다고 말해주지 말고, 깨진 유리조각 위에서 반짝이는 한줄기 빛을 보여줘라." 글을 쓸 때 상황을 설명하려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보여주라는 의미로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가 한 말이다. 문학뿐만 아니라 웹툰 연출에서도 비슷한 원리가 적용된다고 느낀다. 인물의 감정을 대사 또는 독백을 통해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방식보다는 인물이 놓인 상황과 그림을 통해 보여줄 때 더 깊게 와 닿는 경우가 많다. 런데 가끔씩 이 순간 이 인물의 감정이 어떤 모양과 질감 냄새인지 구체적으로 표현해주는 게 매력이 되는 작품이 있다. 힙합신선 작가의 <썩은 핑크의 법칙>(이하 <썩핑법>)이 그런 작품이다.

  머리는 좋지만 대인관계에서 어딘가 삐걱거리는 금주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억울한 일로 과 동기들과도 사이가 틀어지고 겉돈다. 이야기는 금주가 우연히 마주친 한울의 얼굴에 홀려 영화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시작된다. 한울이 보여주는 호감에 들뜨기도 하지만,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내면도 더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금주는 감정이 나아가는 게 두렵다.

  <썩핑법>은 아픈 동생으로 인해 무너진 애착관계 속에서 자라면서 사람들과 벽을 치고 답이 없는 문제들을 두려워하게 된 금주를 비롯해 가족, 성장 환경, 정체성 등의 요인으로 생긴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여러 인물들을 담아냈다. 작품이 특히 집중한 부분은 인물들이 내면의 트라우마를 인식하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썩핑법>이 그러한 자기이해를 설득하고 독자를 참여시키는 방법은 명명이다. 분명 존재하지만 정확히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던 감정들에게 길고 구체적인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픈 동생과의 감정의 골이 터지면서 상처 주는 말을 했던 죄책감의 기억을 감추고 있던 상처가 벌려진 나는 본능적으로 방어를 위한 공격 태세를 취했고 한때 나를 가장 두렵게 했던 그 표정 그대로 너의 생살을 찢었다고 표현한 33화가 있다. 어. 그래…  아네.라는 짧은 대사에 담긴 복잡한 심경을 아예 풀어 설명해준다.

  34화에서 한울에게 처음으로 동생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과거를 돌아보던 금주가 눈치 보고 상황 살피는 습관은 쉽게 놓지를 못해서 쓸데없이 간섭하고 쓸데없이 흔들리고 쓸데없이 기대하고. 애매한 단단함과 애매한 유연함이 뒤섞인 채로 이도 저도 아닌 반죽처럼 된 존재가 내가 평생을 안고 가야 할 나라는 사람이라니.”라고 독백하는 부분 또한 직설적인 대사 연출의 강점을 보여주는 예다. 자기혐오와 불확신으로 타인과의 관계는 물론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조차 나아가지 못하던 금주가 미성숙한 자기 존재를 (아직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받아들이는 모습을 아주 명확하게 전달한다.

  어떤 면에서는 Show, dont tell의 내러티브 원칙을 완전히 깨는 방식이지만, <썩핑법>이 독자에게 다가가는 직접적인 태도 자체가 작품의 매력이 된다. 웹툰가이드 인터뷰에서 힙합신선 작가는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직관성이며, 당분간은 모두가 이해하기 쉬운 연출을 고수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작가가 의도한 바와 같이 <썩핑법>은 모호하거나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겨두기보다 최대한 많은 독자들이 캐릭터를 동일한 방향으로 이해하고 공감의 장을 형성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 공감의 장은 동일시에서 오는 위안으로 이어진다. <썩핑법>은 어딘가 나사 빠진 구석이 있는, 모두와 잘 지낼 수는 없을 것 같은 성격의 금주가 그래도 매력 있는 좋은 사람이라는 점을 설득한다. 독자가 동질감을 느끼도록 유도한 후, 주변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그러한 미완의 면모들을 긍정해준다. 고등학생 시절 나리를 따돌렸던 가영에게, 뒷담화를 하다 들킨 과 동기들에게 할말을 다 해버린 게 자신이 사회성이 없고 미성숙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는 금주에게 “애초에 자기 행동에 늘 확신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상한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나리가 그 역할의 주체다

  같은 회차에서 나리의 대사인 “그래도 금주는 모난 구석이 있다는 걸 숨기려 하지 않잖아. 네 그런 점에 위로 받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걸?”이 <썩핑법>의 작의가 아닐까 싶다. <썩핑법>은 애매하고 소소한데 솔직해지기엔 찌질하고 구린 것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되 그걸 가진 캐릭터를 미워하지 못하게 한다. 독자는 캐릭터와의 동일시로부터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모난 구석만 볼 줄 알던 금주는 “네가 나처럼 다른 사람을 질투하고, 스스로 깎아내리다가도 별거 아닌 것에 위로 받는 사람이라는 게” 좋다며 한울을 받아들이게 된다. 각기 다른 상처와 모난 면을 가진 우리들이 다른 사람의 뾰족한 상처를 수용하는 경험을 통해 우리 자신의 상처도 수용해볼 가능성이 열리는 결말이다. 우리가 모르는 금주 인생의 어느 시점에는 금주가 자기 자신도 좋아하게 될 것만 같다.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을 다 해버리는 작품, 그래서 누군가의 마음에는 정말 깊숙이 가 닿아버리는 작품. <썩은 핑크의 법칙>이다.

필진이미지

김민서

만화평론가
2020 만화·웹툰 평론 공모전 신인부문 우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