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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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 「겨울의 글쓰기」

겨울의 글쓰기 (글 : 윤노아, 그림 : 임성민 / 카카오웹툰 연재) 리뷰

2024-10-02 이성호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 겨울의 글쓰기

  이야기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표현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이든 이야기가 된다. 매클루언(M. Mcluhan)은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고 했듯이 어떤 내용은 형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표현되지 못한다. 이야기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어떤 이야기는 구전되어야 하듯이, 어떤 이야기는 장면에 담겨야 하고, 어떤 이야기는 재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어지도록 그려야 하는 이야기는 어떠한 이야기일까.

  어떤 이야기는 쓰여져야만한다고 한다. 이중피동이 필요할 만큼 이야기는 스스로 나오는 것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누군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무척이나 사소하다. 어떤 사람은 대하소설을 쓰기도 하지만 소설은 小說이라는 점에서 사소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개인이 이야기를 쓸 때 이야기는 더욱 사소해진다. 그러나 이야기는 사소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위한 이야기를 쓸 순 없어서, 진짜 이야기는 남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임과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여야 한다.

  블랑쇼(M. Blanchot)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하였다. 자신이 가장 숨기고 있는 것을 잘라내서 내놓아야 하는 만큼, 그 숨김의 안쪽까지 잘라내는 자기부정과 자기혐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말했다는 것은 그곳에 말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가 담겨 있어야 한다. 문학은 그래서 대중문화와 거리가 무척 먼데, 대중문화가 문자 그대로 대중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면, 문학은 문자로써 말해야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작품이 말해야만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어떤 형식이든 간에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이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 방법이 문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겨울과 조민재의 문학은 그렇게 시작된다. 겨울의 글쓰기는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하는 과정을 담고 있어서 만화보다는 문학에 가까워 보인다. 쓰여져야만 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다시 만화로 쓰여지게 하는 것은 캔버스 위에 여러 재질을 붙이는 파피에 콜레(Papier collle)를 한 것만 같다. 이 작품은 각 재질이 담긴 이야기로 또 다른 이야기를 구성하는 구조가 인상 깊은데, 결과적으로 겨울과 민재가 서로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독자, 혹은 관객이라는 점에서 이야기는 쓰여져야함과 동시에 읽혀져야 한다. 남들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길 바람과 동시에 누군가는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길 바라면서 작품을 빚어나가는 것이다.

  예술과 같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작품의 어떤 부분은 의도가 없다. 작가조차도 그 모든 것들을 의도하고 글을 쓰지는 않는다. 이것은 버지니아 울프(V. Woolf)가 하는 의식의 흐름, 혹은 자동기술법과는 다르다. 문학은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이 혼재된 상태로 존재한다. 합평회에서 한겨울의 소설을 모두가 오해하는 것과 같다. 진실을 꿰뚫린다는 점에서 교수들의 평가는 오해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쓸 뿐이다. 잘려 나간 무의식들이 작품으로 현현될 때 한겨울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지배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지배라기보다는 직시에 가깝다. 직시보다는 관조에 가깝다. 감정은 말에 갇혀서 의미 속에서 휘발된다. 한겨울의 소설 속에서 트라우마의 기억은 내부가 아닌 언어라는 외부 요소로, 제삼자의 이야기로 만들어진다. 작품 속 교수가 말하듯 자전소설은 수필이 아니다. 한겨울의 소설은 그런 면에서 미숙해 보일 수밖에 없다.

  특히 문학은 다른 예술과 다르게 더 결핍과 상실에 대해 다루는 분야이기도 하다. 모든 문장에는 결핍이 깃들어 있다. 후회는 하면 할수록 더 큰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문학적 문장은 후회가 깊을수록 그 후회들을 압축하여 그림자가 짙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어떤 결핍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기도 하지만 진실로 말하고자 하는 문학은 자신의 결핍을 숨김과 동시에 드러낸다. 재희가 설의 화재 사고로 느끼는 상실감과 민재가 할아버지를 잃고 느끼는 상실감, 세윤이 느끼는 문학계에 대한 상실감은 같은 상실로 말할 수 있으면서도 그 결이 모두 다르다. 자신의 상실은 타인으로 인한 것이다. 소중함을 알지 않았다면 상실은 없었을 것이어서 대상의 소중함은 떨어졌을 때 가장 크게 느껴진다. 다시 말하면 상실하기 전까지 대상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혹은 불가능하다.) 이야기는 그래서 상실의 낙차를 느낀 인물로부터 시작한다.

  누구나 상실은 느끼지만, 그것을 표출하는 방법은 매번 다르다. 문학은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올라갔다 내려가는 그 감정의 낙차라는 과정의 결과라서 작가 자신의 아픔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을 스스로 골라내야 한다. 그 골라내는 과정이 상실의 결이다. 과정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문학 작가이니만큼 결과를 원하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문학이 죽어 나갈 수밖에 없다. 자기혐오에 대한 문학은 어디서든지 죽어가고 있다. 자기혐오를 사회가 원하지 않기 때문인 것일까. 세윤이 읽는 책들에 답이 있는 것처럼 문학은 죽어가고 있다. 제일 큰 이유는 자기혐오는 자본으로 치환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를 돕는 가치로 치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남아있어야 스스로의 가치를 확보할 수 있다. 뒤샹(M. Duchamp)이 소변기로 을 만든 것처럼 아무 가치가 없어야 이야기는 살아남을 수 있다. 예술은 자본을 필요로 함과 동시에 자본을 거부해야 한다는 점에서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이야기는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우리는 찾는다. 가치 부여는 그 나중이다. ‘반지의 제왕같은 이야기가 우리에게 일어날 리도 없고, ‘나 혼자만 레벨업과 같은 상태창이 우리 앞에 뜰 리도 없다. 웹툰 또한 그저 우리와 동떨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 동떨어진 이야기들 속에서도 더욱더 동떨어진 겨울의 글쓰기의 이야기는 동떨어진 곳에 존재해서 더 가치롭다. 모르는, 소소한, 동떨어진, 잘려 나간 이야기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이 작품을 구성해 주는 인물들도 그래서 문학을 쓰는 것일 것이다. 웹툰으로 문학을 말하는 모순이 이중피동만큼이나 흥미로워 여러 플랫폼을 뒤적뒤적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필진이미지

이성호

22년 만화평론공모전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