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2019년 여름 몽골 초원 어디쯤 있었다. 하늘과 땅이 납작하게만 느껴졌고 마치 여기가 모든 생명이 시작되는 곳처럼 느껴졌다. 나무도 없이 땅에 바짝 달라붙은 초록이 지평선 끝까지 늘어서는 곳에 나만이 우뚝 솟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당시 나는 몽골이나 티베트나 부탄 같은 곳들에 가보고 싶었다. EBS에서 해주는 <세계 테마기행>에서 그곳들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 마치 학점이라든지 돈이라든지 속세에 나를 지탱하는 모든 것들이 의미 없는 곳처럼 느껴졌다. 마치 소리를 모두 잡아먹은 듯한 공간에 들어간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몽골을 여행하는 동안엔 일행과 함께 여행객들이 북적이는 곳들만 다닌 지라 적막을 느꼈던 적은 손에 꼽았다. 그렇지만 꼬막같이 작은 눈으로 너무 거대한 풍경을 보고 눈이 핑하고 도는 느낌이 들었던 그 순간에도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가슴이 먹먹했던 것이 어쩌면 과호흡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내게 그때 내가 어땠는지 말해주지 않았으므로 평생 모를 테지만 지금 나의 판단은 자연에 압도당한다는 느낌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는 것이다. 나 혼자만이 요란한 그곳에 있노라면 내가 애쓰고 아팠던 것들이 의미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오직 나''만이 그 무의 공간에 남게 된다.
젠더와 섹스 그 사이의 변성
환절기 감기처럼 나는 몽골을 앓고 있다. 유일하게 몇 번이고 찾아보는 사진들, 남들이 다녀왔다는 몽골 브이로그도 열심히 본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익숙한 분위기의 썸네일을 보고 이 웹툰을 클릭하지 않을 방도는 처음부터 없었다. <율리>는 몽골과 티베트고원을 참조해 만들어진 세계에서 펼쳐지는 여로형식으로 진행되는 웹툰이다. <율리>의 세계관에서 인간은 성(sex)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태어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여성과 남성으로 변성하는데 주인공 '율리'는 그 시기가 지났음에도 변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쿠무치의 눈에 띄어 사원에 고용된다. 이후 큰하늘스승이 타계하고 그 뒤를 이을 작은하늘스승을 찾기 위해 쿠무치 관장과 여행길에 오른다. 작은하늘스승을 찾아 나선 길 위에서 '율리'는 처음으로 변성하게 되는데 여성과 남성, 미성 등 불완전한 변성을 보인다. 작중 바쿠투의 어린 지도자 리 소로칸 또한 변성 후 성별이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포로로 잡혀있던 감옥에서 여성으로 변성하였다. 이후 나한드라의 왕자와 혼례를 치르기 위해 이동하던 중 다시 남성으로 변성해 탈출한다. 여성으로 변성한 뒤 '차라리 남자로 변성했더라면,' '이런 수모를 겪지 않았을 텐데.'라며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고 그날 밤 남성으로 변성한 것을 보면 <율리> 세계관에서 변성은 성 정체성과 깊은 연관이 있는 듯 보인다.
'율리'는 '쿠무치'와 함께 백족 해방을 위해 아즈막 왕궁을 급습하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그날 밤 남성으로 변성한다. 그리고 다시 미성으로 돌아갔다가 '쿠무치' 관장을 찾아 '닝기 미히라', '리 소로칸'과 함께 여행하는 지금 여성으로 변성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아직 더 전개된 이야기가 없어 상상력을 더해 변성에 대해 추리해 보자면 '율리'가 신의 사원에 작은하늘스승 후보자로 시험을 치르던 때, '율리'는 현재 작은하늘스승이 된 '낙타'에게 "내가 변성해서 남자가 되면"이라 이야기를 꺼낸다. 어려서부터 '율리'는 자신을 남성으로 여기고 있었던 듯 하며 아즈막 왕궁을 습격하는 사건을 치르며 완전히 남성으로 변성했던 듯 보인다. 그러나 습격이 실패하고 자신의 성을 남성으로 유지할 이유가 없어지며 다시 미성으로 돌아갔다. 최근 진행된 이야기에서 여성으로 변성한 데에는 근거로 삼을 만한 컷들을 찾기 어려웠으므로 판단을 유보해야겠지만 '리 소로칸'과 '율리'의 변성만을 놓고 보아도 어렴풋이나마 성 정체성과 변성 간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사막, 길, 경험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공간은 '길'이다. '리 소로칸'은 옥중에 변성했고 '율리' 그리고 가장 최근 화에서 변성한 '미데' 모두 여행을 떠난 길 위에서 변성했다. 이들이 걷는 '길'은 함백의 사원으로 가는 순례길이다. 각자의 신념에 따라 길을 걷는 그들은 순례자와 겹쳐 보이기도 한다. '리 소로칸'은 여성으로 변성했을 때 돈에 따라 움직이는 '테르무친'과 함족에 멸족당한 백족인인 '쿠무치'를 향해 분노한다. 이후 '닝기 미히라'와의 만남에서 "최대한 많이 보고, 멀리 보는 것이 나에게는 중요하다"라는 말을 들은 것과 '세이케이 한라'에게 돈을 빌리며 따가운 조언을 들으며 자신의 신념을 유지하고 지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의 시작은 '리 소로칸'이 부족의 호위로부터 떨어져 감옥에 갇힌 뒤부터 일어나는 배움들이다.
'율리'와 '미데'는 타인에 자신을 의탁해 살아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율리'는 어머니를 잃은 뒤 '테르무진'의 부대를 따라다니며 소소한 일거리를 도와왔고 첫 여행의 시작도 '쿠무치' 관장을 따라나선 것이었다. '미데'는 '세이케이 한라'의 과보호 속에서 부족함 없이 안전한 강가의 집 안에서 지내왔다. 그런 '미데'는 안락한 삶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고 '테르무진'을 따라 도망치듯 '세이케이 한라'를 떠난다. 그리고 그 여행 중 변성한다. '율리'는 '쿠무치'와 헤어지고 직접 여행의 목적을 수정하고 전진하면서 변성이 일어났다. 이러한 점들을 돌아보았을 때, 삶의 경험 그리고 그 결과 자기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율리> 세계관 속 인물들은 변성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건이 벌어지고 또 어떤 인물이 등장할지 모른다. 또 지금 당장은 '쿠무치' 관장과 '율리'가 다시 만나 작은하늘스승을 만나게 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이 이야기가 결국엔 모든 인물의 내적 성장을 담아낼 것이란 점이다. 서로 다른 인물들은 만나고 헤어지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닮아가고 또 기존에 자신이 알던 방식을 강화할 것이다. <율리>를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독자들 역시 변성할지도 모른다. 그들과 같이 고민하고 걱정하고 또 결정을 내리기도 할 테니까. '율리'의 여행이 끝나는 날 '율리'와 독자들은 어떻게 자기들을 정의하게 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