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의 결핍으로서 행복
0. 재미 없는 이야기
△ 에피쿠로스 (출처: 주간조선)
재미 없는 이야기 하나. 신이 선하고 전지전능하다면, 그러한 신이 만든 세계에 ‘악’이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세계에는 ‘악’이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서 신은 없다. 예수가 태어나기 300년 전에 이루어졌던 이와 같은 에피쿠로스의 논증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은 사실 없다고 답변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악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단순히 선이 결핍된 상태이다. 악을 세상에서 치워버린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남은 문제는 ‘선’이었다. 선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아우구스티누스부터 지금까지 이어진다. 그 중에서 가장 현대적인 답변은 에이어의 정서주의다. 에이어는 ‘선’, 또는 ‘도덕’이란 사람들의 정서적인 반응에 불과하다고 했다. 누가 ‘도둑질을 하는 것은 나쁘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도둑질에 대해 화를 내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굳이 재미도 없는 철학자들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지옥사원>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에이어의 답변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 복잡하게 순환적인 인간.
<지옥사원>의 주인공인 ‘고순무’의 몸에 빙의된 또 다른 주인공 악마 ‘쿼터’는 인간을 따라하려고 노력하지만, 인간적으로 보이는데는 실패한다. 고순무는 지나칠정도로 선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점에서 쿼터는 더욱 어려움을 겪는다. <지옥사원>은 쿼터와 고순무를 비교하면서 끊임없이 인간성에 대해 질문하는데, 이러한 질문은 곧바로 ‘선과 악이란 무엇인가’로 연결된다. 문제는 일반적으로 인간성이 선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에서 비롯한다. 악마라면 당연히 악독하고 누군가를 기만하고 괴롭게만할 줄 알았다는 고순무의 의문에 대해 쿼터의 조수 악마인 루테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신기하네요 그것은 인간의 특성이라고 배우거든요.” 쿼터는 선을 형상화한 것 같은 고순무를 따라할수도 없고, 악독한 인간들을 따라할 수도 없다.
△ <지옥사원>의 쿼터 (귀엽게 생겼다..) (출처 : 카카오 웹툰)
쿼터는 지속적으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대체 왜 인간은 이득을 위해 일하면서 동시에 아무 이득이 없는 일을 하냔 말이야?” 인간은 악독하고 누군가를 기만하고 괴롭히기도 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 일에도 마음을 쓴다. 이유는 순환적이다. 그것이 인간이니까. <지옥사원>의 1부와 2부는 다루는 내용은 이전과 다음과 같이 상식적이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다. 객관적인 선이란 무엇인지 알 수 없어도 인간이라면 무엇이 선이 아닌지는 알 수 있고, 인간이라면 갖추어야 할 예의와 정서가 있다. 기타 등등. 그러나 <지옥사원>은 상식에서 멈추지 않는다. <지옥사원>의 핵심은 3부와 현재 연재되고 있는 4부에 있다.
2. 불행의 결핍으로서 행복
△ <지옥사원>의 고순무 (출처 : 카카오웹툰)
<지옥사원>의 가장 고약한 부분이자 훌륭한 지점은 쿼터와 고순무를 말 그대로 융합시킨 4부의 시작이다. 현재 연재되고 있는 4부에서는 고순무와 악마를 구별하기 불가능해졌다. 보다 정확하게 말해보자면 고순무는 악마인 동시에 인간이다. 고순무의 영혼에 존재하던 쿼터가 인간 고순무의 영혼과 융합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제로갈릭파우더를 출시하면서 ‘진짜 마늘’과 ‘가짜 마늘’이 본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고순무의 말은, 우리에게 보여지는 고순무가 악마인지, 인간 고순무인지 구별될 수 있는지 묻고 있는 <지옥사원>의 테제와 겹쳐진다. 보다 나아가 고순무는 “사람들이 많이 원하는 것이 ‘진짜’”라고 말한다. <지옥사원>은 도덕이란 인간의 정서적 반응에 불과하다는 에이어의 주장에서, 정서적 반응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욕망’으로까지 문제를 확장한다. 쿼터와 융합된 고순무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원하는 것이 선이며, 진짜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 결론에서 비어있는 부분은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고순무는 자신의 생각대로 빈칸을 채우기 시작한다.
고순무는 자신이 납치한 신부와의 대화에서 불행이란 ‘행복하지 않은 상태’라고 정의한다. 마치 악이란 ‘선의 결핍된 상태’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불행이란 행복하지 않은 상태이다. 고순무는 불행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고자 한다. 자신에게 있는지도 몰랐던 ‘불행’을 상기시킨 후 빼앗는 방식으로 말이다. 고순무가 자신의 영혼에 잠식한 쿼터의 이름을 딴 소주인 ‘쿼터’는, 또는 쿼터가 고순무의 몸을 빌려 개발한 소주인 ‘쿼터’는 마시는 사람의 기분을 풀어주고,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안정시킨다. 물론 숙취도 없고 말이다. 문제는, ‘쿼터’를 마시지 않은 상태이다. 기분이 풀리지 않고, 자신감을 빼앗긴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지 몰랐던 불행을 매우 세밀하게 감각하기 시작한다. 쿼터이자 고순무는 불행을 제거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불행을 상기시킴으로써 가속시킨다. 그 과정에서 점점 더 많이 쏟아지는 ‘불행구슬’은 고순무가 채우고자 했던 빈칸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쿼터’를 마시면 세상을 낙관적으로 보게되어 행복하게 되는데 이것이 일반적인 술과 무엇이 다르냐는 고순무의 말은, 표면적으로 선과 악의 경계는 구별될 수 없다는 주제의식을 대표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 세상을 낙관적으로 보게되면 행복해진다는 고순무의 대사는, 세상을 낙관적으로 보게되고 난 후에는, 세계를 조금이라도 낙관적으로 보지 않게 되는 순간 불행하게 된다는 말과 같은 말로 들린다.
고순무의 말처럼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원한다. 행복은 불행의 결핍과 동의어이므로 사람들은 모두 불행의 결핍을 원한다. 불행의 결핍은 선한 것이다. 에이어에 따르면 불행의 결핍은 기쁜 것이다. 기쁜 것은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끊을 수 없이 무한히 순환하는 연결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시작점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내가 보기에 <지옥사원>은 의도하지 않았든 그렇지 않았든 나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을 원하는 것은 맞는 걸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