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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서 이기는 것만이 승리는 아니다 : <데드미트 패러독스>

데드미트 패러독스(글 강찬원반, 그림 사토 / 놀 출판) 리뷰

2024-10-22 최기현

재판에서 이기는 것만이 승리는 아니다 : <데드미트 패러독스>

* 이 글에는 <데드미트 패러독스>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플라톤이 쓴 <대화편>에 프로타고라스의 재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수사학으로 이름을 날리던 프로타고라스에게 어느 날 에우아틀루스라는 젊은 청년이 변론술을 배우고 싶다고 찾아왔다수업료는 모든 수업을 마친 뒤 에우아틀루스가 첫 재판에서 승소하면 내기로 했다시간이 지나 에우아틀루스는 모든 과정을 수강했지만 어떤 재판도 맡지 않고 계속 수업료를 지불하지 않았다이를 괘씸하게 여긴 프로타고라스는 자신의 제자를 상대로 재판을 걸었다프로타고라스는 재판의 승패와 상관없이 돈을 받는다고 자신있게 말했다재판에서 이긴다면 법에 따라 수업료를 받을 것이고자신이 재판에서 진다면 에우아틀루스가 첫 재판에서 승소한 것이기 때문에 수업료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다에우아틀루스 또한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자신은 돈을 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이긴다면 법에 따라 수업료를 내지 않을 것이며자신이 진다면 첫 재판에서 승소하지 못했기 때문에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둘 다 그럴듯한 주장과 근거를 제시했다배심원은 과연 누구의 손을 들었을까이 이야기의 쟁점은 글의 마지막에서 다시 살펴보자.

2.

  나는 오컬트 계열의 영화나 드라마를 어려서부터 별로 즐기지 않았다좀비를 대상으로 한 작품도 마찬가지다무서운 영상을 보면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아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주변에서 명작이라고 극찬했던 워킹데드 시리즈도 본 적이 없다내가 생각하는 좀비는 이성이 없는 상태에서 사람을 발견하면 본능적으로 사람을 물기 위해 돌진한다좀비에게 물린 사람은 좀비에게 전염되어 새로운 좀비가 되고그는 또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선다그 과정에서 쫒고 쫒기는 추격전이 벌어진다이런 숨 막히는 내용을 별로 즐기지 않기 때문에 좀비물을 접할 일도 그동안 별로 없었다. <데드미트 패러독스>에 등장하는 좀비는 조금 다르다좀비물을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읽게 된 것은 좀비에 관한 독특한 설정 덕분이다.

  2023년 12월 오프라인으로 출간된 <데드미트 패러독스>는 한국인 작가 강착원반사토가 2019년 일본 고단샤 공모전을 통해 선보인 작품이다포스타입에서 연재 일주일 만에 누적 조회수 10만 뷰를 기록한 만화이기도 하다올랜드 제국에서 좀비는 죽은 지 30일 이내에 명확하지 않은 어떤 이유로 갑자기 부활하는 존재를 가리킨다좀비는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사람들에게 값싼 노동력으로 부림을 당하는다시 말해 사람에게 차별당하는 존재로 묘사된다때로 본능에 따라 사람을 물긴 하지만 일반적인 좀비에게 나타나는 전염성은 없다극한의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이성을 잃고 신경 자극에 반응하는 것뿐이다좀비의 외모 역시 일반적인 사람에 비해 어느 한두 군데 상해있지만 크게 이질적이지 않다여기에는 작품 전체적으로 수려한 그림체가 한몫했다

  좀비 전담 변호사 골드는 좀비인 동생 실버와 변호사 사무소를 운영한다좀비가 된 아르테미아 가문의 마지막 남은 딸 릴리는 보험회사에 사망보험금을 청구하기 위해 골드에게 소송을 의뢰한다골드의 동생 실버 또한 좀비이기 때문에 좀비를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주체로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것은그동안 좀비를 그린 만화에서 좀비를 사람의 적대적인 존재로 대상화하여 소비한 것에 비해 신선한 설정이다.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기 위해 자신과 자신의 부모님을 죽인 보험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건 릴리가 사망보험금을 받으려면 자신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법원에서 인정받아야 한다. 릴리 측은 전직 왕실 의사장의 의견을 근거로 릴리가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보험회사 측은 좀비라는 존재가 사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올랜드 제국 내 권위 있는 의사의 주장에 따라 좀비는 신체적으로는 사망했으나 부활하여 인간 수준의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사망에는 이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릴리 측의 주장보다 보험회사 측의 주장이 재판정에서 논리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재판 전날, 이미 재판관도 보험회사 측에 매수된 상황이다.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릴리는 보험회사를 상대로 재판에서 승리하여 자신의 사망보험금을 받을 수 있을까?

3.

  앞서 말한 프로타고라스와 아우아틀루스의 주장은 서로 그럴듯하지만 논리학의 역설 중 순환 논증의 오류를 범했다. 조건이 실현되었는지 여부를 근거로 삼아야 하는데 오히려 재판의 결과를 자신의 주장에 관한 유리한 근거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범한 역설적 오류이다. 릴리와 보험회사의 주장도 둘 다 맞는 것처럼 보인다. <데드미트 패러독스>라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패러독스는 우리말로 역설이며 이는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말, 모순된 주장이 오히려 진실에 접근할 때 효과를 발휘한다. 작품의 관전포인트 역시 릴리와 골드가 주장했던 역설적인 논리를 기반으로 한 진실로의 접근이다. 재판에서 승리하는 것이 릴리와 독자의 목적이지만 한발 더 나아가면 재판을 통해 실현된 의도 또한 주목할 만하다. 프로타고라스의 재판이 단지 수업료를 내는지 여부를 판가름하기 위해서 벌인 논쟁이라면, 좀비의 사망 여부를 가리는 논쟁은 단지 릴리의 사망보험금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재판정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좀비의 사망 또는 생존에 관한 판결이지만, 이것은 좀비의 생존권과 연결되어 좀비와 사람이 공생하는 세상을 만드는 실마리로 작용한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좀비를 다룬 작품을 여전히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만화의 독특한 설정과 이벤트 덕분에 좀비물임에도 불구하고 책의 마지막 장까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좀비물을 좋아하는 독자는 물론, 좀비물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논리 대결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타자와 함께 살아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재판에서 이기는 것만이 승리는 아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다면 한번 <데드미트 패러독스>를 끝까지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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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현

문화예술 분야에서 일하며 퇴근 후에 만화를 읽고 글을 씁니다. 공연, 전시를 관람하는 것과 만화 정책에 관심이 많습니다. 최근 글로는 <만화산업 중장기 계획(5차)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과제들>(2022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우수상),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