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기억’, 구호의 봉화(烽火)와 고백의 잔화(殘火) 사이

불씨 (글, 그림 다드래기, 기획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창비 출판) 리뷰

2024-10-25 박동성

기억’, 구호의 봉화(烽火)와 고백의 잔화(殘火) 사이

1. 자유를 향한 향수

  그 누구나 자유를 열망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에서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은 수많은 혁명을 복기해 보면, 인간의 마음에 자유를 향한 근원적 그리움이 깃들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그 혁명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를 상기해 볼 때, 자유를 향한 열망이 생존의 욕구에 맞먹는 절박함을 지닌다고 말하는 것도 과정이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이 열망이 사실 자유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솟아난 것이라고 이해하면 어떨까? 태초에 자유가 있었고 그 자유에 관한 희미한 기억이 인류의 뇌리와 마음에 잔존하여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 욕구를 불러일으켜 왔다면, 인간에게 자유를 향한 근원적 노스탤지아가 깃들어 있다고 바꿔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노스탤지아가 발현된 역사적 사례들 중의 하나로 부마민주항쟁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드래기의 만화책 <불씨>는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아스라한 기억을 재점화하는 작업에 불씨를 보태고 있어 빛난다. 부마민주행쟁은 한국 현대 정치사의 굵직한 시민 항쟁 운동으로 자주 언급되는 4·19 혁명, 5·18 광주 항쟁, 6월 민주 항쟁 등의 광채에 가려져서 다소 소략하게 기억되어 온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이 박정희 유신 독재 체제를 종식시키는 시발점의 역할을 하고 그 이후에도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이 면면히 이어질 수 있도록 기여한 원동력임을 쉽게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런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불씨>를 자세히 읽는 일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와 만화 예술의 만남을 사유하는 각별한 일이 될 수 있다. 이 일이 헛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홍순권 동아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의 글 부산·마산의 시민들이 써 내려간 반유신 민주항쟁의 대서사(이하 대서사)가 <불씨>의 권말 해설로 첨부되어 있다. 대서사는 부마민주항쟁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과정을 아주 촘촘하고 밀도 높게 서술하고 있어서 부마민주항쟁을 세밀하게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다만, 대서사에는 <불씨>라는 작품에 관한 비평적 분석이 거의 담겨 있지 않다. 불씨는 만화다. 그런 만큼, 불씨는 만화의 시공간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역사적 세목을 정리하는 수준을 넘어서 역사와 예술이 접목되는 차원에 눈 맞추는 수준에서 보다 깊이 고찰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이 글은 시작한다.

2. 봉화와 잔화의 동시 점화

  <불씨>는 박정희 유신 체제에 저항하여 민주화를 도모하고자 했던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현장을 여러 등장인물의 시선과 기억을 통해 그려냄으로써 자유를 회복하려는 인간의 본원적 염원까지 담아낸다. 그 염원은 두 발화(發火) 양태를 통해 발화(發話)한다. 하나는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봉화요, 다른 하나는 내밀한 고백을 전하는 잔화다.

  <불씨>는 편지를 통해 서로의 진솔한 일상을 내밀하게 주고받는 두 펜팔인 윤은미와 유진숙의 관계를 기본 설정으로 삼는다. 이때, 편지는 부마민주항쟁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개인의 미시적 관점에서 주관화하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세월의 풍파를 견디고 살아남은 편지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 그 자료의 내용은 개인의 진실한 고백이다. 비록 그 당시의 정황을 완벽히 객관적으로 기록할 수는 없지만, 그 역사적 정황에 관한 기억과 고백의 흔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편지는 고백의 잔화라 비유될 만하다.

  잔화의 작은 불씨라도 바람을 타면 멀리 날아가기 마련이다.”(107) 너도나도 국가폭력”(215)에 대항하여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109)는 고백을 꺼내는 때에 항쟁의 규모가 잦아들지 않고 더욱 커져”(117)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잔화가 번져서 거대하게 불타오르는 봉화는 유신철폐 독재타도”(83)와 같은 정치적 구호에 이르러 마침내 폭발한다.

  무한한 자유가 보장되는 에덴동산은 이미 소실되었고, 그 이후 여러 가지로 조건 지어진 세상에 우연히 내던져진 인간은 자유를 향한 어슴푸레한 기억을 품고 있으니, 선험적 천국”(206)이 그 자신에 대한 잔상을 인간의 심중에 아로새기며 그 잔상이 근원적 이상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순환이 반복되는 형국이다. 이런 형국을 경유하여 생각해 볼 때, 봉화와 잔화는 사실상 동일한 불씨이고 그 둘이 하나의 불씨로 겹쳐져 서로 다른 모습으로 제각기 타오르는 모양새를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두 극점이 동시에 극대화되면서 부산과 마산의 시민들이 자유를 향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3. 말의 자유와 이미지의 기억

  <불씨>는 작품 후반부에서 부마민주항쟁 당시의 시공간적 상황에 있었고 그 상황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기억하는 이들의 인터뷰 장면을 제시한다. 이 인터뷰 장면 부분도 역사적 기억을 소환하고 기록하는 또 하나의 만화적 장치다. 인터뷰 장면들이 인상 깊은 이유는 또 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성도 없었”(225)던 유신 독재 체제에 의해 언론의 자유”(63)가 억압당했던 것은 당연지사. 그렇게 발언의 자유를 요구하고 되찾은 지금의 시대에서 부마민주항쟁 진행 당시에 있었던 여러 사건과 부조리 들을 그 참여자·피해자들이 자유롭게고백하는 인터뷰는 묵직한 울림을 자아낸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인물의 내면을 통해 사회와 역사의 단면을 깊이 있게 굴절시켜 형상화하는 작업이나 우리는 스스로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208)라는 교훈을 명시적으로 전달하는 작업은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으로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다시 말하면, 굳이 만화 매체가 아니더라도 앞의 작업들은 할 수 있다는 회의가 제기되는 것이다<불씨>는 이 회의를 어떻게 사그라뜨릴 수 있을까?

  이 도전적 과제에 제출할 수 있는 하나의 답안도 <불씨> 안에 있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후, 어느덧 중장년이 된 은미와 은미의 오빠 태석은 태석이 운영하는 치킨 가게에서 TV를 보다가 부마민주항쟁을 진압했던 경찰의 폭행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 유치준 씨에 관련된 뉴스를 접하게 된다. 그 뉴스를 바라보던 늙은 은미와 백발의 태석은 그 바로 다음 장면에서 각각 앳된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과 젊은 대학생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다. 둘의 얼굴은 어떤 면에서는 다소 놀란 듯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꽤 멍한 듯한 표정을 보여준다. 부마민주항쟁에 관한 그 두 사람의 기억을 이미지로 표현한 연출로 볼 수 있는데, 이 연출은 부마민주항쟁의 기억이 여전히 강력하게 현재진행 중임을 표현하는 데에 효과적으로 이바지한 연출이라 평할 만하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이미지로 절묘하게 구사하는 능력<불씨>는 그런 만화적 문법을 기억하는 만화다.

필진이미지

박동성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2023 대한민국 만화평론 공모전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관련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