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을까?
인간은 실존적 한계인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사용한다. 영혼의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에 의탁하며 육체의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과학기술을 활용한다. 하지만 종교의 내세적 구원은 증명할 길이 없으며 과학의 기술적 구원은 아직 갈 길이 요원하다.
이들에 견주어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하는 세 번째 방법은 ‘기억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 노력해왔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영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방법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존재가 예술가다. 그들은 서사와 언어, 여러 감각을 활용하여 죽을 존재와 죽은 존재를 죽지 않는 예술로 재생시킨다.
<안녕, 에리>의 주인공 유타는 영화를 통해 이러한 예술가의 역할을 감당한다. 유타가 제작하는 두 편의 영화는 각각 엄마와 에리의 죽기 전 모습들을 담음으로써 그들의 죽음이 완전한 끝, 완전한 안녕이 되지 않도록 만든다. 유타가 만든 영화를 통해 엄마와 에리는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어 살아 숨쉰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것으로 죽음을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두 편의 영화는 <안녕, 에리>에서 마치 수미상관처럼 대응되도록 짜여 있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표면상 드러나는 둘의 공통점보다 이면에 숨겨진 둘의 차이점이다. 이 차이점을 들여다봄으로써 영화-예술이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모호성에 있다. 엄마의 부탁을 받아 찍게 된 영상의 범주는 첫 페이지부터 학교 문화제에 상영되는 장면까지로 비교적 명확하다. 이 영화에는 <데드 익스플로전 마더>(이하 <마더>)라는 제목까지 부여된다. 반면 이후 에리의 제안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는 제목도 밝혀지지 않을뿐더러 그 시작과 끝이 모호하다. 짧게 본다면 유타가 플롯을 정한 직후 유타의 아빠와 에리가 연기하는 장면부터 두 번째 학교 문화제에서 상영되는 장면까지겠지만, 길게 본다면 <마더>가 포함되는 첫 장면부터 만화의 마지막 장면까지, 이 만화 전체가 유타가 만든 두 번째 영화(이하 <에리>)일 수 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영화로 보느냐에 따라 그 나머지 부분은 자연스레 영화 바깥, 즉 유타의 현실이 된다는 점에서 만화 속 영화와 현실은 구별되지 않는다.
하나의 장면이 현실로도, 영화로도 해석될 수 있게끔 후지모토 타츠키는 다양한 장치들을 활용한다. 특히 가장 실험적으로 활용한 방식은, 주로 영화에서 사용되던 촬영기법인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를 만화에 접목시킨 것이다. 대부분의 컷을 영화 필름의 비율로 일정하게 자른 데다 핸드헬드까지 만화적으로 구현해 모든 장면이 유타의 카메라로 촬영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킨다. 따라서 독자는 카메라 너머, 컷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유타의 실제 삶인지, 영화 촬영을 위한 연기인지 구별할 수 없다. 형식적으로 모호하더라도 내용과 서사를 통해 영화와 현실을 구별하고자 할 수 있지만 이것도 쉽지 않다. 결말부의 의혹점들, 즉 중년의 남성이 유타인지 유타의 아버지인지, 에리는 죽기 전의 에리인지 부활한 흡혈귀인지, 모든 해석이 가능하게끔 초중반부에 복선들이 제시된다.
하지만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찾고 결말과 인물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안녕, 에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두 번의 영화 촬영에서 유타에게 어떤 변화가 엿보이느냐이다. 두 영화는 모두 유타의 자의로 시작된 것이 아니며, 촬영을 제안한 사람의 죽음까지를 촬영한다는 목적을 향해 가고, 문화제에서 상영된다는 것과 (두 번째 영화 <에리>를 마지막 장면까지로 봤을 때) 폭발로 끝맺는다는 공통점들이 있지만, 두 영화에서의 유타는 전혀 다른 감정선과 의지를 향해 있다. 그리고 이 차이를 결정짓는 것은 촬영을 의뢰한 두 사람, 엄마와 에리의 차이다.
엄마의 촬영 의뢰는 유타의 생일에 이뤄진다. 이날은 유타가 주인공이어야 하건만, 죽기 전까지의 자신을 찍어달라는 엄마의 제안으로 인해 이날부터 문화제 상영까지 주인공은 엄마가 된다. <마더>에서 유타는 자신 또한 영상에 담아보려 하지만 유타의 얼굴은 핸드헬드로 인해 불분명하게 등장하거나 스마트폰에 얼굴 대부분이 가려진 채로 등장한다. 유일하게 유타가 정상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병원 폭발 신(‘1차 폭발’)이다. 이렇게 볼 때 이 1차 폭발은 기존의 주인공인 엄마를 무너뜨리고 유타 자신이 영화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시도로 이해해볼 수 있다.
하지만 1차 폭발이 유타 아버지의 입을 빌어 더 분명하게 연결되는 것은 ‘판타지 한 꼬집’이다. 유타의 아버지는 유타의 영화에선 폭발이 생각난다며 유타가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것에 판타지 한 꼬집을 넣으려 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유타는 왜 그렇게 판타지에 집착했을까? 후반부에 드러나듯 유타는 사실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엄마의 폭언과 손찌검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유타가 판타지에 집착하는 것은 가혹한 현실에 대한 도피 혹은 극복의 욕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판타지와 마찬가지로 작품 전체에서 현실의 대척점으로 제시되는 것은 ‘영화’이기도 하다. 즉 유타에게 있어 ‘판타지’와 ‘영화’는 현실의 대척점으로서 동일시되며, 이 둘은 현실과 비현실을 가름하는 기준이자 인물의 실제 모습을 왜곡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폭발=판타지=영화라는 등식을 유타 개인의 가정사적 결핍과 욕망에만 적용한다면 이 만화에서 ‘영화-예술’이 갖는 여러 층위의 의미를 지나치게 제한하게 된다. <안녕, 에리>에서 이 등식은 유타 개인을 넘어 인간의 실존적 욕망인 ‘죽음의 극복’으로 연결된다. 어쩌면 <데드 익스플로전 마더>라는 제목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 이 이상한 어순의 제목은 <데드 마더> 사이에 ‘익스플로전(폭발)’이 낀 형세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엄마’와 ‘죽음’ 사이에 ‘폭발’이 낌으로써 죽을 존재인 엄마와 죽음 사이의 거리는 멀어진다. 유타가 폭파하기 원하는 대상은 자신에게 고통을 준 엄마일 수도 있지만, ‘마더’를 실존적 한계인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인 ‘인간’ 전체로 넓혀 이해한다면 폭파의 진짜 대상은 죽음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폭발과 판타지와 영화는 더욱 밀접해진다. <안녕, 에리>에서 ‘영화’의 가장 큰 목적은 비존재를 존재하게 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며, 에리가 흡혈귀라는 ‘판타지’는 영생에 대한 욕망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폭발과 판타지, 그리고 영화는 죽음에 대한 진정한 구원이 될 수 있을까? 유타는 첫 번째 영화 <마더>를 완성했지만 그에 대한 사람들의 무시와 비판을 받고는 복수심과 염세주의에 빠져 첫 번째 자살을 기도한다. 두 번째 영화 <에리>를 상영하고는 사람들의 평가를 반전시킬 수 있었지만 여전히 회의주의에 빠져 지내다, 교통사고로 가족 모두가 죽는 사건을 겪고는 다시 한 번 자살을 기도한다. 영화는 유타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는커녕 죽음을 향해 가도록 박차를 가한다.
‘난 눈앞에 닥친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고 마는 버릇이 있어. 어머니의 죽음도, 에리의 죽음도, 카메라를 통해서 지켜봤다. 고등학생 때 자살을 생각했던 때도 그랬지. 오직 카메라 앞에서만 현실을 볼 수 있다.’
카메라를 통해서만 현실, 즉 죽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혼자서는 죽음을 직면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영화는 사실 죽음을 극복하는 수단이 아니라, 마치 엄마와 에리의 아름다운 모습만 편집했던 것처럼 죽음을 판타지적으로 편집하고 왜곡해보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소극적이고 회피적인 시도에서 죽음과 엄마, 그리고 에리는 유타의 주관으로 수용되지 못한 채 카메라라는 외물 바깥에서 맴돌 뿐이다. 결국 영화는, 예술은, 죽음이라는 현실과 실존 앞에서 철저하게 무용하고 심지어 나쁘다. 두 번째 문화제에서의 성공적인 상영 이후 제대로 된 삶, 영화 제작자로서의 삶을 산다는 플롯은 현실의 유타에게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영화 속에선 가능했던 유타와 에리의 연애도 현실에선 이뤄지지 않는다. <마더>에 대한 선생님과 친구들의 평가에서 드러나듯 영화는 ‘윤리’라는 현실의 잣대 앞에서 손쉽게 ‘똥영화’가 되고 나쁜 것이 된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이 비관론은 어디까지나 <마더>, 즉 엄마의 영향권 아래서만 작동한다. 에리로부터 시발된 두 번째 영화 <에리>(만화의 마지막 장면까지)를 기준으로 본다면 영화의 의미는 어떻게 달라질까? 일단 엄마와 달리 에리는 자신이 아닌 유타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유타의 생일날 주인공을 차지한 엄마와 대조적으로, 에리는 유타가 자살하려 한 날에 새로운 영화 촬영을 제안한다. 에리는 <마더>에 대해 ‘제목은 어머니인데 가장 매력적인 등장인물은 유타’였다며 두 번째 영화에선 다른 누구가 아닌 유타의 이야기를 보고 싶다고 말한다. 에리는 영화와 판타지와 폭발의 목적을 성취해주는 존재다. 즉 유타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주고 그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결말부는 사람들의 해석과 평가가 갈리는 지점이지만, 결국 주목할 점은 에리가 유타에게 어떤 존재이며 에리로 인해 유타가 어떤 변화를 겪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에리는 두 번째로 자살을 기도하는 유타 앞에 또 한 번 구원자로 등장해 유타의 죽음을 막는다. 분명히 죽었던 에리가 어떻게 살아있냐는 유타의 질문에 에리는 죽은지 사흘만에 되살아났다고 답한다. 유타는 에리가 1000년을 산 흡혈귀라는 플롯은 짰지만 부활하는 능력이 있다는 설정은 넣지 않았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의도가 엿보이는데, 첫 번째로는 에리에게 부활한 예수, 구원자 예수라는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한 가지 추측을 덧붙이자면 이 경우 ‘유타’는 예수를 로마에 팔아넘긴 가룟 유다에게서 이름을 따왔을 수도 있다. 격하게 표현하면 결국 유타는 에리를 팔아 그 영화로 자신의 명성을 회복한 셈이며, 가룟 유다가 그러했듯 최후에는 자살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결말부의 에리는 마치 제자 베드로의 죄와 부정을 용서하고 품어주는 예수 또한 떠오르게 한다.
수십 번을 반복해 다시 태어난다는 설정은 또한 ‘영화-예술’의 속성과도 연결된다. 인간은 한 번의 탄생과 한 번의 죽음으로 그 존재가 끝나지만, 영화는 감상자에 의해 시작과 끝을 수없이 반복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에리의 존재는 ‘영화’ 그 자체를 가리킨다. ‘에리는 모두가 자신을 어떤 식으로 떠올릴지를, 유타 네가 정해 주길 바란 게 아닐까?’라는 대사를 통해 유타는 ‘에리’라는 영화의 플롯을 배치하고 편집하는 역할, 영화에서 가장 주체적인 ‘감독’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유타가 첫 번째 영화를 제작할 땐 갖지 못한 역할이었다. 무엇을 찍을지는 엄마에게 달려 있었으며, 유타가 감독으로서 주체성을 발휘한 부분은 고작 ‘판타지 한 꼬집’, 폭발뿐이었다. 엄마로부터 비롯된 영화는 유타를 엄마와 죽음, 예술과 현실에 종속적인 존재로 만들었지만, 영화 <에리>와 사람 ‘에리’는 유타를 죽음에서 구원하고 삶과 영화에서의 주인공으로 세워놓는다.
그렇다면 마지막 장면의 폭발(‘2차 폭발’)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또한 <마더>의 마지막 장면인 1차 폭발과 비교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두 장면에는 한 가지 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같은 시퀀스에 ‘안녕’이라는 대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만화의 제목에도 들어가는 ‘안녕’은 한국어에선 다양한 상황에서 쓰이는 인삿말이지만, 일본어로는 ‘사요나라’라는 헤어질 때의 인삿말, 그것도 다시 보지 못할 상황에서 쓰는 인삿말이다. 이렇게 볼 때 1차 폭발 신에서 유타가 엄마의 죽음을 보지 않고 도망치며 ‘안녕, 엄마’라고 외치는 것은 ‘죽음’과 ‘엄마’로부터 영영 벗어나고픈 유타의 욕망과 두려움이 격렬하게 표출된 것이다. 그렇기에 1차 폭발에서의 유타는 실제로 건물이 폭발하지도 않는데 눈을 질끈 감고 건물로부터 뛰쳐나온다.
반면 2차 폭발에서의 ‘안녕’은 여러모로 다르다. 엄마 때와 달리 여기서 유타는 에리를 직접 마주 본 채 이 작별인사를 주고받는다. 실제로 폭발하는 건물을 빠져나오는 유타의 표정은 미소와 생기를 띄고 있고 발걸음은 여유롭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영화의 끝이라는 이별의 상황은 동일하다. 하지만 유타는 이를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수용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별과 죽음을 수용하고 재인식하는 삶을 에리가 알려줬기 때문이다. ‘부모도, 연인도, 친구도 모두 먼저 죽는다고. 그런 인생에 절망 안 해? / 이전의 에리는 분명 절망했을 거야. 그래도 괜찮아. 나한테는 이 영화가 있으니까. 볼 때마다 널 만날 수 있어.’ 이러한 에리의 대사를 통해 영화의 목적은 ‘죽음’에서 ‘삶’으로 치환된다. 예술의 목적은 지나간 과거나 죽음 같은 운명을 바꾸는 것처럼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예술을 감상하는 순간 그것은 감상자에게 미소가 되고 눈물이 되며 이 현재적인 감정 안에서 그에게 주체성이라는 감각을 일깨워준다. 죽은 존재는 카메라 너머라는 외물에서 삶을 얻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자아 속에서 새로운 삶을 얻는다. 그렇기에 유타는 미련 없이 추억의 장소와 에리를, 과거에 얽매인 자신을, 죽음에 대한 실존적 두려움을 ‘안녕’이라는 인사와 함께 날려보낼 수 있다.
<안녕, 에리>(2022)보다 한 해 앞서 발표한 <룩백>(2021)이 극장 애니메이션으로 개봉하며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룩백> 또한 판타지 한 꼬집을 첨가해 죽음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보여줌과 동시에, 예술가가 창작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감상자와의 관계성, 공감과 연대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안녕, 에리>는 후지모토 타츠키가 <룩백>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숙한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문화제 상영 후 관객의 반응을 살피고 그 반응으로 인해 자살을 기도하는 유타의 태도는 <룩백>의 창작관에 비해 지극히 비관적일지언정 타자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진 않다. <체인소맨>이라는 대히트작을 연재하며 독자들의 다양한 반응에 영향을 받았던 경험이 반영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말부 에리의 대사,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영화가 가르쳐줬어’처럼, <안녕, 에리>는 후지모토 타츠키가 어떤 예술가인지를, 그리고 어떤 예술가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