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무×쏘키 작가 <안 할 이유 없는 임신> 리뷰: 저출산 시대, 아기 갖는 만화
만화로 낳은 남성 임산부
취업난, 빈부격차, 외모지상주의 등 웹툰은 사회문제를 다뤄 큰 호응을 얻었다. ‘저출산’ 역시 사회문제 중 하나지만 관련 만화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임신과 출산은 유경험자가 아니면 접근하기 어렵고, 저출산 이슈는 다양한 원인이 혼재해 불필요한 논란만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개인의 내밀한 경험에서 출발한 일상툰에선 관련 주제를 다루기도 하는데, 2018년 연재된 쇼쇼 작가의 <아기 낳는 만화>가 기조라고 할 수 있다. <아기 낳는 만화>는 난임, 인공수정, 산부인과 진료 에피소드 등 잠재적 임산부로서 몸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상식은 가졌지만 정작 임신 이후의 삶은 예상하기 어렵던 가임기 여성(15~49세) 독자들에게 진짜 임신에 대해 알려줬다. 또한 올해 1월 자녀를 출산한 자까 작가는 <육아 일기>를 통해 임신·출산 과정을 하이퍼리얼리즘으로 풀어내며 동시대 아기 낳는 만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두 작가는 임산부, 엄마로서 몸소 겪은 경험을 전달하고 웃음으로 승화하지만, 예상치 못한 수치심과 굴욕은 물론 식욕, 면역력, 신체활동 등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일상툰의 특성상 여성 작가-여성 독자 간의 친근감이 작용해 독자는 임신으로 인한 심신의 불편, 고통 등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재확인하게 된다.
한편 BL장르에선 오메가 버스 세계관 기반의 남성 임산부 키워드 만화가 꾸준히 발표되고 있다. 오메가 버스는 알파, 베타, 오메가 세 종족으로 분리된 세계관으로 오메가는 여성과 남성 모두 임신할 수 있다. 현재 5권까지 정식발매된 히지키 작가의 <싫은 채로 있게 해줘>는 미혼모 오메가 나오토가 알파인 하즈키와 재혼해 아이 둘을 더 낳아 기르는 로맨스+가족드라마다. 이와 같은 오메가 버스 다둥이 서사는 임신수의 변주와 확장성을 보여주지만, 저출산 시대상을 반영하거나 ‘임신·출산장려’에 이바지하진 않는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BL은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포르노그래피’로 여성 캐릭터 걱정 없이 결혼-임신-출산 이야기를 즐기는 비현실적인 판타지성에 매료되는 것이다. 그리고 2023년 노경무×쏘키 작가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이하 안임신)엔 남성으로 태어나 임신을 고민하는 남성이 등장한다. 이야기 배경은 합계출산율 0.4명이 된 2030년 대한민국이다. 남성의 몸에 줄기세포를 이식해 남성도 임신할 수 있는 설정 덕분에 남성들은 임신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임신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처지가 된다.
어느 삼대독자의 ‘임신할 결심’
<안임신>은 최정환, 강유진 39세 동갑내기 부부가 주인공이다. 유진은 10년 넘게 난임으로 고통받지만, 정환은 정자 제공자로서 소임을 다할 뿐 임신은 자기 일이 아닌 양 여유롭다. 그때 TV에 나온 김삼신 박사는 남성도 임신할 수 있음을 천명하고, 임신이라는 과제는 유진에게서 정환에게로 옮겨진다. 이상이 <안임신>의 프롤로그다. 저출산을 다룬 SF장르는 과학의 힘을 빌려 저출산 문제를 극복한 시점에서 출발해 생명윤리를 주제로 삼는다. 실제로 인공 자궁이 현실화하면 여성이 출산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데, 굳이 남성 임산부를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남성이 임신 및 출산의 고통을 느끼길 바란다면 임산부인 아내와 몸이 바뀌는 바디체인지 설정이 더 직접적이었겠으나, <안임신>은 가임기 남성을 등장시키고 그를 고민에 빠뜨린다.
정환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서 신체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린다. 잉태하며 배가 부르고 가슴에서 모유가 나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시각적 충격이다. 정환은 자신이 삼대독자라는 사실을 최후의 보루쯤으로 여기지만, 본가에선 남자건 여자건 대를 이을 아이만 낳아주면 된다는 식이다. 곤란에 빠진 정환이 ‘임신할 결심’을 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프롤르그에서 느낀 상쾌한 전복감은 사라진다. 정환이 겪는 갈등은 임신을 권하는 혹은 가능케 만든 세상과의 불화가 아니라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임신과 출산을 스스로 선택할 이유를 찾는 것이고, 그것은 여성 독자라면 한 번쯤 해봄 직한 고민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될 당사자가 된 정환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만의 서사에 내재하므로 함구하지만, 그에게 여성끼리 공유하던 고민이 전가되어 이제 아내에게 위로를 받는 처지가 되고, 아내는 같은 목표를 가진 경험자이자 동지로써 동병상련을 느낀다.
언젠가 ‘인권은 상상된 공감’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타자, 정확히는 약자에 대한 상상만으로 상대방이 겪는 어려움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안임신>은 성 역할에 대한 관념이 고정적인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남성도 임신이 가능한 이야기를 통해 ‘상상된 공감’을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구체화하는 데 성공한다.
안 할 이유 없는 공감
가임여성 1명당 평생 출산할 아이 수를 의미하는 ‘합계출산율’은 저출산의 위기감을 조성한다. 정부는 합계출산율을 높이려 ‘가임기 여성 출산지도’, ‘여학생 조기입학’, ‘고학력 여성 페널티’ 등 극복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 아이디어들은 사회적 문제를 여성에게 책임 전가했다는 비난만 받고 사라졌다. 문제는 공감의 부재다. <안임신>이 저출산 이슈에 관한 해결책을 모색한 것은 아니지만 남성 임산부가 임신할 결심을 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에 임산부에 대한 공감이 필요함을 설득력 있게 호소한다. 이것은 여성 독자에게 생경한 경험이다. 특히 남편의 임신을 돕는 역할을 하는 아내는 얼마나 낯선가. 독자는 일상툰 속 작가 임산부를 걱정하고 오메가버스를 타고 온 남성 임산부를 관람하다 <안임신>을 보고 비로소 임신·출산에 관한 사회적 공감대의 필요성을 새삼 발견한다.
<안임신>은 2022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다양성 만화 제작지원작과 2023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출판 지원작으로 선정되었고, 오픈 플랫폼 딜리헙에서 연재되며 세상에 알려졌다. 소위 말하는 주류만화는 아닐지언정 동시대에 사는 독자의 지지와 인정받은 셈이다. 이는 저출산 이슈를 다룬 만화로써 거의 유일하며 유의미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만화로 낳은 남성 임산부, 최정환의 순산을 기원하며, <안임신>의 탄생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