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출신이고요, 콤플렉스 얘기 맞습니다
지방의 소도시에서 나고 자랐다는 사실은 한 개인의 시야와 정서에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의료, 교육, 교통 등 생활을 위해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수도권에 함몰된 나라에서라면, 출신이 콤플렉스가 되는 것은 퍽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충청남도 보령 출신이라는 사실이 콤플렉스로 작용하는 것이 절대 내 성격 탓만은 아님을 미리 밝혀두는 중이다.
지금은 먹지 않지만 고유명사 ‘던킨도넛’과 일반명사 도넛이 동일시되던 때가 있었다. 다른 브랜드의 도넛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머리가 크고 도시에 진입해서야 누군가의 생활은 선다형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됐다. 선택이라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 그 차이가 진학, 취업, 이사 등 삶의 국면마다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충격은 배신감으로 옮겨갔고, 어느덧 “보령? 아, 그 녹차~” 같은 말이 들리면 재빨리 눈에 쌍심지를 켜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참고로 “아, 그 녹차~”는 보성이며 보성은 전라남도다.
‘시골 출신’이라는 것이 콤플렉스는 콤플렉스인데, 설명할 수 없이 반짝거려서 자꾸 돌아보고 어루만지게 된다는 것은 스스로도 흥미롭게 생각하는 점이다. 솔직히 ‘도시 촌놈’들은 모르는 세계를 알고 있다는 우쭐함이 들기도 한다. 세상의 중요한 일은 모두 서울에서 일어난다는 듯 지방 출신을 멋모르는 이로 취급하는 사람들에겐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수치스러워 숨기고 싶은 치부가 아니라 기회만 된다면 제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애틋한 자랑거리였음을 여기서 밝힌다.
흑심을 품은 까마귀처럼 반짝이는 콤플렉스를 야금야금 모아온 것은 아마도 <지역의 사생활 99>를 리뷰하기 위함이었다고, 선후 관계가 맞지 않는 결론을 내렸다. 지역 격차를 고민하는 데서 출발했다는 소개말을 읽기도 전에, 표지에 새겨진 지역명들이 이름만 봐도 반가웠기 때문이다. 콤플렉스란 게 원래 그렇게 비합리적으로 작동한다. 아무 개연성 없이 출신만 보고도 한풀 너그러워지는 것이다. 지연(地緣)이라면 지연인데, 휘두를 권력 같은 것은 없으니 눈감아줬으면 좋겠다. 여러모로 편파적이고 주관적인 글이 될 것임을 미리 밝힌다.
북구플랜빵 작가의 <4 공주>는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공주’의 지역명을 활용한, 유쾌한 농담 같은 만화다. ‘공주’에 사는 네 명의 여중생 ‘4 공주’가 주인공이다.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익살이 그치지 않는다. 왁자지껄한 성격의 동급생 네 명이 모인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이야깃거리가 만들어질 테지만, 지방의 청소년이라는 특징이 안 그럴 것 같아도 은근히 차이를 만드는 것이 재밌다.
4 공주의 시험 기간과 같은 시기에 진행되는 백제문화제는 만화의 중심이자 지역색이 가장 선명히 묻어나오는 소재다. 하나의 축제가 한 지역을 대표한다고 말하는 것은 효과적일지 몰라도 사실은 무심하고 편협한 말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4 공주>는 지역축제를 배경 삼아 지역색을 드러내면서도 그 과정이 이벤트가 아닌 일상으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지역(민)의 사생활’을 잘 그려냈다고 느껴진다.
축제 행렬을 장식하는 거대 기악탈을 거리 한복판이 아닌 방구석 책상 앞에서 마주친다는 점이나, 전국 3대 축제로 유명한 백제문화제 관광이 여행이 아닌 외출로 그려지는 점이 그렇다. 날을 잡아 교통과 숙박을 예약한 뒤 대대적으로 다녀오는 여행이 아니라, 시험이 끝나고 동네 미용실에 들렀다가 저녁에 모여 실컷 논 뒤 친구 집에서 다 함께 잠드는 외출로 그려졌다. “백제문화제 보려고 침대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건희’의 말대로, 한나절도 안 되는 가뿐한 관광은 관광도시 지역민의 특권일 것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껏 돛배 운영을 위해 쓰레기를 주웠는데 운영이 무산됐다며 울분을 터뜨리는 장면이었다. 중학생 때 머드 축제 퍼레이드에 동원됐던 내 개인적 경험이 어쩔 수 없이 소환됐기 때문이다. 지역축제 부흥을 위해 청소년 차출은 정녕 불가피한 것일까. 깊은 공감과 가벼운 측은함이 뒤섞인 오묘한 기분을 느꼈다.
금강을 소재로 한 농담이나 사투리 사용은 축제보다 조금 더 섬세함이 요구되는 웃음 포인트라 할 수 있겠다. 물이 없는 금강을 보며 “우리 금강이 좀 매트하지”라고 말하는 것이나 한강처럼 넘치는 부대찌개 국물을 졸여서 ‘금강’으로 만들라는 식의 농담은 금강을 끼고 사는 지역민 사이에서나 통용될 맥락 개그다.
사투리 역시 비슷한데, 사투리 자체가 웃기다기보단 대개 사투리가 웃기고 편한 상황에서 사용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실 젊은 충청도 사람의 사투리 사용은 상당히 경미한 수준일 때가 많아서(충청도 내 지역 차이와 개인차가 있을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돌 굴러가유’ 같은 느낌으로 충청인을 이해하고 있었다면 그 판타지는 높은 확률로 배반당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4 공주가 보여주는 사투리 사용은 실재에 가깝다. 실없는 얘기를 주고받는 와중에 내뱉는 “뭐여”는 그 짧은 한마디에 어이없음과 핀잔의 의도를 사실감 있게 담아내고 있으며, “지금 제 등짝에 쌀가마 얹으신거유?”처럼 어미 ‘-유’가 상황극에나 등장하는 것 또한 현실적이다. 과장 조금 더해서, 젊은 세대들에게 그 어미는 역사 속으로 희미해진 옛날의 담화 관습에 가깝다. 사투리를 활용한 상황극은 네이티브에게도 능청스러움이 요구되는 고맥락 개그인 것이다.
지방의 청소년이 주인공이 됨으로써 <4 공주>가 포착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지역성은, 공간 자체가 하나의 ‘타임캡슐’이 되는 감각이다. 대도시와 비교해 지방 중소도시의 시계는 느리게 돌아갈 때가 많다. 유행하는 프랜차이즈가 밀물과 썰물처럼 빠르게 들어왔다 빠르게 나가는 풍경이 대도시만큼 흔하지는 않다. 시장의 관점에선 어떨지 모르지만 추억의 관점에선 나쁘지 않은 일이다. 시시각각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땅에 타임캡슐을 묻을 수는 없는 법이기에, 변화가 더딘 지역의 땅은 추억을 담아두기 좋은 장소가 된다. 학교, 유적지, 오래 자리를 지키는 가게들. 고정된 물리적 공간은 특별히 무엇을 묻지 않아도 그 자체로 자연스레 타임캡슐이 되고, 그 공간에 오래 머물렀던 이들이 때때로 추억에 젖는 것을 돕는다.
한 곳에서 나고 자라고 나고 자라는 토착민의 경우, 기억이 한 개인에서 더 나아가 세대를 거쳐 교차하기도 한다. 건희가 우연히 엄마의 중학생 시절 일기장을 발견한 뒤 자신과 또래였던 엄마의 일상과 고민을 같은 툇마루에 앉아 경청하는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의 풍경이 세대를 통과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엄마가 거쳐 갔고 지금 자신이 거쳐 가는 16살이라는 시간의 풍경 역시 아주 다른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이 공간을 통해 형상화된다. 가끔은 불안했지만 대체로 마음껏 웃고 떠들 수 있던 성장기의 추억. 아주 달라지지는 않을 지역의 풍경이, 4 공주가 그들의 보호자만큼 나이 든 어느 날에 또 한 번 추억의 매개체가 되어주지 않을까. 후퇴나 쇠락이 아닌 일상과 기억의 말로 읽어낸 지역의 사생활은 이토록 명랑하고 아늑한 것임을 <4 공주>가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