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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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리스너>: 들어주는 존재의 의미

굿 리스너 (글, 그림 쥬드 프라이데이 / 네이버 웹툰 연재) 리뷰

2024-11-12 김득원

<굿 리스너>: 들어주는 존재의 의미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거쳐가는 고민 상담소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갈까. 수많은 가설이 있지만 경험해 본 이가 극소수에 속하므로 결국 믿음의 문제로 넘어갈 테다. <굿 리스너>의 만화가 쥬드 씨는 고민상담소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을 조건으로 선배의 사무실을 1년간 공짜로 게 된다. 듣는 것뿐이라면 얼핏 쉽게 느껴진다. 그러나 고민상담소에 찾아오는 사람들이란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가는 사람들, 즉 죽은 사람들이었다.

<굿 리스너>의 망자들은 매체에서 일반적으로 다루던 귀신과 제법 다르다. 미련과 원한을 마구잡이로 풀면서 악령이 되었다거나, 일상에 개입하여 주인공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다거나 하지 않는다. 멀쩡했던 생전 모습 그대로 고민 상담소에 방문하여 쥬드 씨에게 본인의 사연을 풀어 놓을 뿐이다. 쥬드 씨는 주인공이지만 관찰자이자 들어주는 사람으로, 사연을 말하는 화자들을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된다.

  <굿 리스너>는 <길에서 만나다>, <진눈깨비 소년>의 쥬드 프라이데이 작가의 후속작으로 2022년에 완결되었다. 옴니버스식 드라마 장르로 총 65화, <굿 리스너>인 쥬드 씨는 여러 인물의 사연을 듣는다. 연인이나 친구, 자식이나 부모, 때로는 불특정 다수 등 이승에 남을 각별한 누군가에게 마지막으로 마음을 전하기 위해 고민 상담소를 찾는 것이다.

  쥬드 프라이데이 작가 특유의 맑은 수채화 톤의 작화에 더해 문학적 울림이 있는 내레이션, 무해한 말장난 속에도 삶에 대한 깊은 사유가 담겨 있어 새삼 묵직하게 와닿는 작품이다. <굿 리스너>는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절망과 아쉬움이 아니라 삶의 소중함과 의미를 돌아보도록 하며, 실화를 모티브로 재구성한 허구의 인물들을 내세움으로써 극적인 현실성을 담아 냈다. 망자의 사연이 나열된 옴니버스식 구성은 무척이나 익숙하므로, 본 지면에선 <굿 리스너>의 에피소드 일부를 소개하기 보다 들어주는 사람(listener)의 가치의 의미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귀가 있기에 가능한 입의 폭력

  사랑을 사랑이라 부르는 게, 성공을 성공이라 부르는 게 오해를 낳는 시대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너무 많은 정보로 인해 사람들은 같은 단어에도 여러 의미를 붙이게 되었다고 본다. 의견도 아닌 결론만 남아 떠돌고, 자기만의 사유를 통한 깨달음인 것마냥 재단하여 공언하곤 한다. 그런 입이 도처에 널려 있다. 입들은 편을 찾는다. 편을 구하고, 편을 맺는다. 개인과 개인의 다름은 인정받는다. 그러나 개인이 모여 공동체가 되면 그 안에서 개인은 배척당한다. 차별이 시작되는 것이다. 차별은 다수의 권력에서 기인한다. 권력를 가진 다수는 그 인원만큼의 입을 확보한다. 대개 같은 의견, 비슷한 의견이기에 서로를 포용하고 보호한다.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주는 관계망은 개인의 존재감을 희석시킨다.

  보호막 속 여러 입들을 멀리서 보면 하나의 입처럼 보인다. 권력을 가지게 된 큰 입, 수많은 입은 나무와 닮은 외관을 가지게 될 것이다. 입 안에 검은 잎을 숨겨도 나를 감출 수 있을 때 폭력성이 드러난다. 폭력의 매커니즘이다. 입의 폭력은 귀가 있기에 가능하다. 보호막 속 입들의 귀는 이미 서로의 고성방가로 마비되었지만 보호막 밖 입들의 귀는 소음에 휩쓸리지 않은 상태이다. 이에 내부의 폭력성은 외부의 적막에 가닿는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전제, 소속감은 일종의 보호막이다. 소속으로부터의 배척이란 사회적 죽음이 되는 셈이다.

제대로 들어주는 존재의 위안

  망자를 위한 고민 상담소는 (이승에서) 격리된 입들이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곳이다. 리스너 앞에 굿이 붙을 수 있는 건 격리된 입의 언어를 들을 유일무이한 귀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 쥬드 씨는 습관처럼 매번 들어줄 뿐이라고 말한다. 만화가답게 사연을 들으면서 사연 속 어느 장면을 묘사한 그림 1장을 그리고 망자에게 건네는데, 그 그림으로 말미암아 사연 속 인물을 만나게 되면서 망자의 마음을 전해주곤 한다. 이해가 공감으로, 또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그린 걸로 보인다. 그러고 보면 일종의 유행처럼 자리잡은 지금의 공감과 추천은 실체 없는 보호막은 불안하기에, 일단 나는 너의 편이라는 태도를 보이고 너도 나의 편이 되어 달라는 압박을 전하는 수단이 되어 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소비재가 아니니까 남발하는 거다.

  진정한 공감과 소통은 단 둘일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본다. 어떤 외부의 자극을 경계하지 않아도 될 때,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주류에서 벗어나 비주류가 된다는 두려움을 잊을 수 있을 때, 철저히 잃은 뒤에야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아저씨>의 나는 오늘만 산다. 내일을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라는 대사는 강렬했다. 그런 의미에서 <굿 리스너>에서 오롯이 두 명만 존재하는 장소의 등장은 필연이었다. 그래야만 좋은 청자가 되어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상황이어야만 정말 의미 있는 관객, 독보적이고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외롭고 잃을 게 없는 상황이 되어야만 서로에게 특별하게 남을 수 있을 수 있다니, 한편으론 끔찍하고 서글프다. 위안이라 적었으나 사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의 지푸라기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당연하게도 각자의 세상에선 각자가 주인공이다. 그렇기에 변변치 않음을 알고 있음에도 늘 라는 사람의 존재 의미에 대해 고민한다. 거창하게 말하면 영향력이지만 가치, 역할 등에 대해 생각하는 거다. 고민의 기간이 길어지면 결국 혼자임을 의식하게 되면서 말과 행동이 지나치게 대범해지거나 소심해진다. 그래서 <굿 리스너>를 떠올렸다. 누구라도,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나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준다면 충분하지 않나 싶었다. <굿 리스너>의 사연들을 읽고 있노라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진심(嗔心)인 걸로 보인다. 진심을 다해 이입하여 공감하게 되는 것,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각별한 무언가가 남는 것, 돌이켜보면 서로로 묶은 혼자들이 모여 이루어진 게 세상이 아닐까. 진심으로 들어주는 존재의 위안, 굿 리스너란 단 한 명을 위한 청자다. 주인공의 자리를 기꺼이 양보해야만 얻을 수 있는 타이틀이다. 당신이 어느 순간 사무치게 원하게 될 이를 <굿 리스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필진이미지

김득원

만화 평론가
E-mail: dokwon0o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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