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의 보석함엔 나의 보석이 담겨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던 시절이 있었다. 친구들이 하는 거라면 뭐든 같이 하고 싶었고, 내가 싫어하는 것들일지라도 군말 없이 내 취향을 꿰맞출 의향도 충분했다. 잘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보너스 시간을 많이 주는 노래방을 찾아다니고 이미 조금 질려버린 게임도 친구들이 한다면 빠지지 않고 꼭 껴야 했다. 열두 달 중 며칠이 모자란 2월에 태어나서 조금 어리숙했는지는 몰라도 다른 친구들은 이미 탄탄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20살 초엽까지도 나는 여전히 여린 뿌리로 친구들을 움켜잡고 있었다. 카카오톡으로 새벽까지 연예인이나 드라마, 가족 이야기를 떠들어댔지만, 이야기 토픽은 매일 아침 등교하면 새롭게 리셋됐고 아침부터 한참을 수다 삼매경이었는데, 교복 마이만 걸치고 하얀 입김이 나는 강당에서 불안한 음정으로 졸업식 노래를 부른 뒤로는 이야기 토픽이 쌓이는 속도를 친구들과의 대화 시간이 따라가질 못했다. 그렇게 케케묵은 이야기들은 나누지도 못한 채 유통기한을 다 해버렸고 끝내 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곤 했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그들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등속운동을 하며 자꾸만 멀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했던 사람 중 여전히 연락하며 지내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넉넉히 들어온다. 간간이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싸우고 멀어진 사이도 있다. 내 세계에서 영영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도 있다. 이런 지인들이 문뜩 떠오를 때면 추억을 뒤적이다가 카카오톡을, 인스타그램을 뒤적이곤 한다. 우리는 싸운 적도 없었고 서로 불편해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펄쩍 뛰면서 반가워했고 연락하지 못했던 시간을 미안해했는데, 그냥 그렇게 멀어졌다.
공감은 댓글을 낳고
<사리네 보석함>은 주인공 '사리'가 어딘가 이상한 사람들과 뒤섞이며 겪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보석함'은 '사리'의 인간관계를 빗대어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다. '사리'는 이제 막 20대가 된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만나는 인연을 이 보석함에 담아 애지중지한다. 설익은 인간관계의 모습들을 단정한 그림체로 그려낸 웹툰은 우리 모두의 시절을 대변해 준다. '사리'를 보면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서인지 걱정하는 댓글이 심심치 않게 보이는데 댓글들이 건네는 조언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된다.
친구와의 관계가 틀어질까 봐 기분이 상해도 웃어넘기는 '사리', 끝끝내 친구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하지만 주체하지 못한 감정에 눈물을 쏟으며 도리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된 '사리', 이성과 조그만 접점만 생겨도 수만 가지 각본을 써내는 '사리'를 보니 지난 어떤 순간의 내가, 겨우 잊어냈던 수치스러웠던 기억들이 악성 팝업창처럼 튀어나온다.
가능하다면 '사리'를 뜯어말리고 싶은 마음이 담장을 타고 퍼져나가는 담쟁이처럼 빠르게 마음을 뒤덮는다. 여전히 지난날의 과오로 더디게 스크롤을 내리지만 떼어 버리고 싶은 순간들 덕에 지금이 있다는 걸 알기에 먼저 수치스러운 순간을 겪은 선배(?)로서 '사리'가 중심을 잡으며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길 응원하게 된다. 독자들 또한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사리'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댓글에 '자연스러운 20대의 모습'이라며 사리를 두둔하는 댓글도 눈에 띈다. 또 '사리'에게 공감하는 독자들의 댓글을 보면서 '역시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며 나의 과거에 면죄부를 받기도 한다.
관계를 세공하는 방법
'사리'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 '수정'과의 관계에서 미묘한 권력관계를 느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시선을 돌릴 정도로 예쁜 '수정'은 '사리'를 생각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은 뱉어버리고 '사리'가 호감을 느끼는 남자들과 금세 친해지고는 이내 그들에게 고백을 받곤 했다. 이런 이유로 '사리'는 '수정'과 사람들이 가득한 번화가에서 크게 싸웠지만 다시금 서로를 용서하고 숨겨왔던 치부를 나눈다. 이를 계기로 '사리'는 자신의 보석함에 있던 '수정'을 더욱 애지중지했다. 그러나 새로운 사건에 부딪히며 둘은 서로가 이전처럼 친구로 지낼 수 없음을 깨닫고 우정의 징표로 구매했던 키링을 나눠 가지며 약속이라도 한 듯 관계를 정리한다.
'사리'는 고등학교 때부터 붙어 지내던 '수정'과의 관계를 정리하며 '왜인지 자연스러운 감정'마저 느낀다. '수정'과의 관계에서 묘한 불편함을 느꼈던 순간부터 '사리'는 이 관계의 끝을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좋아했던 친구와 관계를 마무리 짓는 과정에서 '사리'는 화내다가도 웃고 또 울었지만, 그랬던 모든 과정과는 달리 의외로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를 보석함에서 꺼내 놓는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는 끝이 아닌 새로운 장으로 넘어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수정'이 수모를 겪는 모습을 보고 달려가 돕는 모습이나 대학 동기가 '수정'을 험담할 때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던 이전과 달리 다시 한번 '수정'을 욕하는 친구의 말을 끊고 '너무 나갔다'며 '수정'을 두둔하는 모습 그리고 결정적으로 둘은 우정의 증표로 구매했던 키링을 마지막 순간에 나누어 가졌다. 이러한 컷을 보면 둘은 이전의 수여-제공의 관계에서 의리로 이어진 대등의 관계로 변화한 듯 보인다.
당신도 나도 또 절대 그렇지 않을 것 같은 어떤 이도 밤잠을 설칠 만큼 수치스러웠던, 천방지축이던 시절이 있다. <사리네 보석함>은 모두가 하나쯤 가진 기억을 공감대로 만들며 독자들에게 담백한 위로를 건네는 웹툰이다. 20대는 세계가 부쩍 크면서 정신적 성장통을 겪는 나이인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성숙한 이들은 성장통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 시간이 지나갈 테지만 누군가는 걷기도 힘들 정도로 끙끙 앓을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 돌아본 자리에는 튼 자국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애석하게도 마음의 성장은 눈으로 볼 수도, 키를 재듯이 숫자로 나타낼 수도 없다. 그렇기에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이란 시간이 모여 성장해 감을 직접 느끼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나를 둘러싼 세계가 바뀔 때마다 자기의 세계도 넓어지고 있다. 지난날 수치의 무게만큼 '사리'의 세계는 더 깊어졌을 것이고 지우고 싶은 순간의 길이 만큼 '사리'의 세계는 넓어질 것이다. 이야기 끝에 '사리'의 보석함은 얼마나 견고해질까? 또 어떤 보석이 담겨 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