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그리고 여전히 제목 없음
0.
나는 사회에서 말하는 ‘힐링’을 싫어한다. 나는 급진적인 체제 변환을 꿈꾸는 나를 더 좋아한다. 급진적인 체제 혁명을 좋아하는 척 하기 위해서는, 힐링은 사회에게 향해야 할 분노를 가라앉혀 체제 안정에 기여한다든가, 치유는 표면적인 상처를 봉합함으로써 행해지는 외면에 불과한다든가 기타 등등의 비판을 수행해야 한다. 사실 이런 비판은 인문대를 다니거나, 현대 철학 수업을 들어봤거나, 한병철의 책을 읽어봤거나, 하다못해 트위터를 한다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비판이다.
솔직해진 김에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내가 힐링을 싫어하는지 잘 모르겠다. 힐링물을 싫어하는걸 좋아할 뿐이다. 이건 힐링물을 싫어하는 것과 다르지 않나? 애초에 힐링물이 뭔데? 마음이 급해 반말이 튀어나오게 된다. 조금 더 점잕게. 힐링물이 뭘까? 사람들은 어떤 작품을 보고 치유를 얻는 걸까? 잘 모를 땐 내 이야기로 일반화해버리는 게 좋다. “내가 그렇다는데 어쩔꺼야” 라는 뻔뻔함은 글을 쓸때 필요한 덕목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니 말이다. 생각해보니 페미니스트들의 구호를 내가 써도 되는걸까? 허락해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내가 그렇다는데 어쩔꺼야
1. 아직 제목 없음.
△ <아직 제목 없음> 출처 : 네이버 웹툰
(밤 열한시에 퇴근한 뒤 집에서 새벽 네시까지 일해 잔뜩 화가나서 욕을 뱉으며 나온) 아침 출근길에 네이버 웹툰 앱을 배회하다가 발견한 ‘아직 제목 없음’이라는 제목의 웹툰은, 솔직하게 말해서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제목을 ‘아직 제목 없음’으로 짓다니. 철지난 방식 아닌가? 약간의 비웃음이 섞인 미소를 띠면서 웹툰에 들어갔던 나는 퇴근할때까지, 아니 집에서 자기 전까지 그 웹툰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이 웹툰을 읽으면서 느꼈던 나의 마음에 대해 누군가는 그게 바로 힐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떨 호들갑을 위해 줄거리를 잠깐 요약하자면, 이 웹툰은 친구도, 의욕도, 특기는 없고 상처와 불만과 결핍만 있는 고등학생 ‘천천희’가 자기와 비슷할 것이라고 예상한 같은 반 친구 ‘구준휘’와 친구가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줄거리 요약치고 간략하지만 19화까지밖에 공개되지 않아 어쩔 수 없다.
△ <아직 제목 없음> 출처 : 네이버 웹툰
내가 이 웹툰을 보면서 멈춰선 장면은 여러개인데, 우선 천희가 준휘를 보며 희망이 생긴다는 독백을 시작할 때부터 멈칫하기 시작했다. 천희의 독백은 “너 같은 애도 사는데!” “알아. 못됐다. 못 된 생각이다.”, “미안 너한텐 미안하지만 나도 좀 살자. 이렇게라도 좀 버틸게”로 연결된다. 바로 다음 독백은 내가 아예 멈춰선 장면이다.
“근데, 그렇게 계속 보다 보니 이제는 왠지 짠해져서 자꾸 마음이 쓰인다.”
친구도 의욕도 특기도 없어, 자기 인생이 망해버렸고 엄마에게 미안한 고등학생이 택한 방법이 ‘나보다 더 인생 망해보이는 애 찾기’인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성공은 어떤 경우에도 위로가 될 수는 없다. 같이 실패한 자만 위로가 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보다 더 실패한 사람은, 그 사람이 더 실패한 정도만큼 큰 위로가 된다. 문제는, 그런 실패한 자의 모습이 나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 ‘짠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나의 마음을 위로하는 수단으로 쓰는 것은, 어찌되었든 나의 마음에 자리를 내어주는 과정을 동반한다. 내 마음을 위해 잠깐 들인 타인의 모습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의 마음에 자리잡을 때 나는 쫓아낼 수 있을까? 그건, 나를 내 마음으로부터 쫓아내는 일은 아닐까?
이후에 천희는, 준휘도 자신을 보며 “불쌍하다”고 생각했음을 알게 되고 서로 목이 터져라 웃는다.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 그 웃음은 그들을 불쌍하지 않게 만든다. 언젠가는 다시 불쌍해질 수도 있겠지만, 그때에는 더 크게 웃을 것이다. 안쓰러움, 불안, 불만과 함께 웃을 것이다. 웃음은 안쓰러운 우리를 감싸안을 것이다.
2. 여전히 제목 없음
나의 아주 오래된 편견 중 하나는, 모든 작품과 거리를 두면서 작품을 분석하는 냉철한 평론가가 더 세련됐다는 편견이다. 나는 ‘냉철함’이 일정한 권력 관계를 전제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몰입하지 않는 사람은, 몰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다. 몰입하지 않는 사람은, 그 작품에 몰입하지 않더라도 세상의 모든 작품이 그 사람이 속해 있는 세계에 대해서 말하기에 몰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누군가는, 자기가 속해 있는 세계에 대해서 말하는 작품이 등장하면, 그 작품 하나로 몇 년을 떠든다. 그런 사람이 그런 작품에 몰입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것이 사회에서 말하는 ‘세련됨’과 거리가 멀다는 것도 알고 있다. 세련은 무관심에 기반을 두고, 무관심할 수 있어서 무관심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아직 제목 없음’이 나를 “어떤 누군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천천희와 구준휘가 속한 세계는 나의 세계이다. 나는 친구도, 의욕도. 특기도 꽤 있는 편이지만 그것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 나의 이런 추상적인 추측은 다음 멈춰선 장면에서 확신이 생겼다.
△ <아직 제목 없음> 출처 : 네이버 웹툰
천천희와 똑같이 하루종일 잠만 자던 ‘준휘’가 어느 날부터 생기가 생겼고, 건강을 신경쓰며, 심지어는 운동을 한다. 어머니의 입원으로 힘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준휘의 사연은 잠깐의 안타까움을 자아냈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주목한 지점은 아니었다. 내가 멈춰선 장면은 구준휘가 ‘운동’ 중에서 달리기를 선택한 이유에서였다.
“다른 건 요령이 필요하니까 어려운데, 걍 계속 참으면 되는 거니까, 그냥 참는 건 그나마 좀 쉽잖아. 익숙하기도 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난 방금도 6km를 뛰고 왔다. 나는 강박적으로, 비가 오거나 길이 미끄럽거나 영하 15도거나 영상 35도거나 상관없이 매일매일 6km를 뛴다. 준휘의 말처럼 달리기는 어떤 재미도 없는 그저 ‘참는’ 운동이다. 나는 내가 달라기를 왜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는데, 이 웹툰은 나에게 내가 달리기를 왜 좋아하는지 설명해줬다. 너는 ‘참는’ 것을 좋아한다고. 너의 넘치는 의욕은 너 자신이 너를 탈출할 방법이 없어 너가 너인 것을 ‘참는’ 방법의 일종이고, 달리기는 너가 너 자신으로부터 탈출하는 물리적이고 유일한 방법이서라고.
나의 이런 생각은 ‘세련된 해석’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자기화된 텍스트 읽기로부터 도출한 생각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주 끈질기고 뻔뻔하게, ‘구준휘’, 그리고 ‘천천희’ 이 해석을 밀어붙일 것이다. 준휘와 천희가 속해있는 세계를 탈출할 때까지 밀어붙일 것이다. 그리고 준휘와 천희가 속해있는 세계를 탈출할 때 나도 데려가달라고 부탁하는 대신, 준휘와 천희가 나간 새로운 세계를 나의 세계와 연결시킬 것이다. 준휘와 천희의 탈출한 세계는 나를 끌어안을 것이다. 나의 세계가 그들을 끌어안지는 못하겠지만, 같이 웃기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닐 수도 있지만 맞을 것이다. 내가 그렇다는데 어쩔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