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가 미래를 도울 수 있는가?
좋은 SF 작품이 나왔다며 처음 이 만화를 추천받았을 때 의구심이 있었다. 이제 1권밖에 출간하지 않은 만화에 대해서 그 좋고 나쁨을 얼마나 파악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 독특한 세계관이나 강렬하고 화려한 장면, 독자를 쥐고 흔드는 도입부 전개 등으로 ‘좋은 1권’을 평가할 순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좋은 작품’이 될 순 없다는 생각이다. 영화의 첫 10분은 120분의 완성도를 결정할 수 없고, 하물며 도입부 자신의 가치도 결정할 수 없다. 더 긴 시간 스케일에서 어떤 사건이 전개되고, 인물이 어떤 변화를 겪으며, 어떤 결말로 나아가 어떻게 주제와 맞물리는지가 작품과 도입부의 가치를 결정할 것이다.
그럼에도 <풀 나이트> 1권은 이 한 권만으로 충분히 좋았다. 1권을 둘로 나누어 볼 때, 전반부는 세계관과 주인공에 대한 설명이고 후반부는 주인공에게 맡겨진 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다. 이 구도에서 서사를 구성하는 3요소인 배경(세계관)과 인물(주인공), 사건(후반부 사건)은 어느 것이 과하게 앞서지 않는다. 앞서지 않을 뿐 아니라 세 요소가 서로 긴밀히 협응하며 작품의 분위기, 그리고 아직은 희미할 법한 주제의식을 한결 선연하게 한다. SF 장르의 특성 상 작가 자신이 창조한 세계관을 힘주어 선보일 법도 한데 그런 욕심을 딱히 부리지 않는다. 세계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레 인물이 돋보이고, 인물에 몰입하고 있으면 어느새 사건에 빠져든다. 작가가 이끄는 방식을 따라 배경과 인물, 사건의 순서로 1권을 톺아보자.
<풀 나이트>는 24세기의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세계에 대한 첫 서술은 이렇다. “짙은 구름이 햇빛을 가린 지 100년이 지났다.” 그래서 이 세계에는 낮이 없고 언제나 밤이다. 태양빛이 없기에 식물이 살 수 없고, 따라서 산소가 부족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 ‘전화(轉花)’ 기술이다. ‘전화’란 인간을 식물로 바꾸는 기술로, 죽을 때가 가까운 사람의 몸에 씨앗을 심으면 그 사람의 ‘넋’을 거름 삼아 2년에 걸쳐 서서히 식물이 된다. 그렇게 된 식물을 ‘영화(靈花)’라고 부른다. 전화 시술을 받은 사람에게는 나라에서 지원금 1000만 엔이 나와서 완전히 영화가 되기까지의 2년을 마음대로 보낼 수 있다. 1권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낯선 단어는 ‘전화’와 ‘영화’ 둘뿐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형이하학적 주제와 형이상학적 주제를 떠올린다. 전자는 환경이고 후자는 죽음이다. 100년 전 짙은 구름이 어쩌다 생겼는지 알 수 없지만, 환경보다 자본과 기술의 성장을 우선시하는 21세기의 흐름을 이어가다 보면 충분히 저런 미래에 당도하리라고 우리는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죽음을 앞둔 인간이 식물이 됨으로써 그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도 공감할 수 있다. 그리하여 <풀 나이트>는 이런 질문들을 던진다. ‘이 끝없는 밤, 빛이 없는 세상의 원인은 무엇(누구)인가?’ 그리고 ‘식물이 된 인간은 죽음을 극복한 것인가? 그가 인간이긴 한 것인가?’
주인공 카미야 토시로의 삶은 이 어둡고 괴이한 세계에서의 삶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토시로는 매일 14시간씩 공장일을 하며 월급 9만 엔을 벌어 엄마와의 생활을 꾸려 나간다. 월세와 엄마 약 값, 그리고 독특한 세금(광열비, 산소세)을 내고 나면 2만 엔으로 둘이서 생활해야 한다. 정신 장애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의 엄마는 약이 떨어져 증세가 악화되면 칼을 들고 토시로를 찌르려 한다. 1000만 엔을 받기 위해 토시로는 몸속에 공업 폐수를 넣어 죽을 상태가 된 후 그의 소꿉친구 요미코에게 전화 수술을 요청한다. 그렇게 자세한 상황이 나온 인물은 주인공 토시로밖에 없지만, 어딜 가나 배경에 등장하는 영화 혹은 전화 중인 인간들의 모습은 토시로와 비슷했을 인생을 짐작게 한다.
토시로의 삶은 앞서의 두 주제를 연결하고 확장한다. 토시로의 불행한 삶은 변한 ‘환경’에서 기인하여 애매한 ‘죽음’(혹은 애매한 삶)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 세계관과 주제, 인물의 삶에 깊게 관여하고 있는 문제로 작품은 ‘세대 문제’를 지적한다. 적어도 1권만 봤을 땐 그러하다. 토시로를 상처 주는 인물은 언제나 기성세대다. 공장 감독은 그에게 월급을 주지 않으며 의사는 토시로가 어떤 상황이든 돈 없이 도움을 주지 않는다. 토시로는 그럴 때마다 자신의 잘못을 묻는다. 엄마의 칼에 찔리면서는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단 말입니까?” 생각하고, 어릴 때 모르는 아저씨가 멜로디언을 망가뜨렸을 때는 “선생님, 저는 나쁜 짓 안 했죠?”라고 묻는다. 이어서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른들은 다 그런가요? 이 세상 어른들은 하나같이 화만 내요.” 작중 유일하게 성숙해 보이는 기성세대인 선생님은 이렇게 답한다. “저 먹구름이 모두의 마음에 뚜껑을 덮어서 남을 밀어내고 좁아진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한단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러게 되지 않도록 너희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렴.” 하지만 그런 기성세대 아래서 자란 세대가 갑자기 ‘마음의 여유’를 가질 리 없다. 그 말을 들은 토시로의 친구 요미코는 여전히 “그 꼰대 꼭 죽일 거야.”라고 말하고, 토시로는 “잘 모르겠어요.”라 답한다. 용서를 거부하거나 용서가 뭔지 모른다.
후반부의 사건 또한 세대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피아노과를 다니는 대학생 마츠노 스미는 어린 시절 피아노를 잘못 칠 때마다 아버지의 폭행과 폭언에 시달렸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전화하며 받은 지원금으로 스미를 대학에 보내곤 자취를 감췄다. 스미는 아버지도 싫고 피아노도 싫지만 이런 세상에서 피아노라도 치지 않으면 여자 혼자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 채 죽으리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피아노를 칠 때마다 두려움, 압박감, 죄책감 등이 응축된 그림자가 느껴져 감동적인 연주가 나오지 않는다. 스미는 영화가 된 아버지를 찾아 불태움으로써 아버지의 존재를 지우고 자기 뜻대로 피아노를 치게 되길 원한다.
여기에 토시로가 갖게 된 능력이 필요해진다. 토시로는 여타 수술자들과 달리 전화 수술 이후로 영화가 하는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능력으로 토시로는 노린재나무가 된 스미의 아버지를 찾아주고, 스미와 아버지가 서로에게 생각과 감정을 전할 수 있도록 연결해준다. 그 연결을 통해 스미와 아버지에게는 변화가 일어난다. 스미는 아버지에게 ‘나쁜 아빠’뿐만 아니라 ‘좋은 아빠’ 또한 있었음을 떠올린다. 그럼에도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겠다 말하며 자신의 고통을 아버지의 영화에 전달한다. 아버지는 이 태양 없는 세상에서 괴로움은 당연하다 말하지만, 스미의 몸에서 전달된 하얀 무언가와 접촉하고는 인간일 적 이해하지 못했던 스미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불완전한 나무의 언어로 ‘미안했다’는 말을 전한다. 어느새 토시로의 능력과 상관없이 두 존재는 소통하고 교감한다.
작가는 왜 하필 식물로서의 인간을 떠올렸을까. 인간과 자연, 동적 존재와 정적 존재, 착취자와 피착취자 같은 대비를 잘 보여주기 때문일까. 이 대비는 작품 전반의 감정적·관계적 거리감을 형성하고 그 공백을 서늘한 공포로 채운다. 그러나 동시에 작가가 집중하는 순간은 그 대비되는 두 존재가 연결되는 순간이다. 식물과 인간은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주고 받는다. 영화가 된 인간은 괴상한 형태로라도 무언가 계속 말하고 있고, 그것을 들어주는 존재로서 토시로가 등장한다. 스미의 몸에서 나온 하얀 것은 스미의 감정을 담아 아버지의 영화에 가 닿는다. 작중 영화가 내뿜는 ‘산소’와, 피아노 연주를 듣는 사람들의 ‘감동’도 하얀 알갱이로 표현된다. 전화할 때 식물을 자라게 한다는 인간의 ‘넋’이나, 선생님이 토시로에게 당부한 ‘마음의 여유’ 같은 표현들도 반복해 등장하는데, 이 하얀 것과 연관된 개념으로 이해된다. 토시로는 “1000만 엔으로 마음의 여유를 사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마음의 여유는 돈으로 사는 게 아닐지 모른다. 토시로에겐 단지 어머니와의, 공장 감독과의, 의사 선생님과의, 모르는 아저씨와의 교감이 필요한 것 아니었을까.
스미는 아버지의 ‘미안했다’는 말을 듣고도 “용서할 리가 없잖아.”라고 말한다. 나무를 불태우려던 라이터의 기름은 다 떨어지고 없다. 스미의 앞에는 노린재나무의 꽃술이 떨어져 있다. 들었던 대로 불꽃 모양을 한 꽃술을 보며 스미는 말한다. “아버지, 당신을 피아노로 만들겠어요.” 고통의 원인을 비워낸다고 그 빈 자리가 마음의 여유가 되진 않는다. 스미는 고통의 원인이었던 아버지를, 자신의 연주를 통한 감동의 원천으로 재탄생시킨다. 아버지였다가, 노린재나무였다가, 피아노가 된 그것은 이제 산소조차 배출하지 못하는 명확히 죽은 존재다. 하지만 왠지 스미가 그 피아노를 연주하는 한, 그것은 아버지였을 때보다 더 살아 있는 느낌을 줄 것 같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속 영혜는 폭력과 죽음 사이에서 식물이 되고자 한다는 점에서 <풀 나이트>와 겹쳐지는 면이 있다. 신자유주의 질서 아래 암약하는 폭력과 소외는 인간을 식물화하거나, 식물이라도 되고 싶게끔 만든다. 얼마 전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락 강연 ‘빛과 실’에서, 5.18 자료와 국가폭력의 역사적 사례들을 읽으며 이런 질문을 떠올렸다고 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이 질문을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로 바꿈으로써 <소년이 온다>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고 했다. 역사가 아닌 미래를 다루는 SF에 적용한다면 ‘현재가 미래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미래 세대를 위해 환경을 보호하자는 식의 명제가, 희생이 사라진 오늘날 강한 억제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반대로 ‘미래가 현재를 돕는다’는 생각이 필요할지 모른다. 우리가 아직 인간이자 기성세대로 남아 있음을 상기하며, 식물이 되고 더 나아가 기꺼이 피아노가 될 미래를, 나는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