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일일을 응원합니다.
마츠모토 타이요 작가의 작품은 빈틈없는 시나리오와 정형화되지 않는 작화, 스테레오 타입을 거부하는 주인공이 특징이다. 그런 이유로 작가의 만화는 언제봐도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또한 스포츠, SF, 시대극,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에서 상상력을 발휘해 작가의 색이 뚜렷하고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하여 40년 가까이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작가의 작품은 근래 웹툰으로 편집해 서비스되지만, 만화책으로 감상했을 때 작화의 섬세함과 연출의 깊이를 여유 있게 감상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작가의 최근작 <동경일일> 역시 책으로 구매했다. 작가의 주특기인 성장물이나 판타지를 배제하고, ‘동경’이라는 실제 지역을 배경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다루는 것이 전작과의 차이점이다. 등장인물은 만화업계 종사자로 현역만화가, 만화 어시스트, 편집자들이며, 이들은 만화출판사를 퇴직한 편집자 ‘시오자와’와 크건 작건 교류가 있었다. 동경에 사는 중년의 평범한 남자, 시오자와에게 주어진 모험은 무엇일까?
만화로부터 도망친 남자
이야기는 만화편집자 시오자와의 퇴사에서 출발한다. 그는 자신이 발간한 만화잡지가 판매부 진으로 폐간한 것에 책임지고 자발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한다. 그가 만화를 사랑하는 마음, 만화가를 동경 혹은 존경하는 마음은 주변 사람이라면 모두 안다. 안경을 써서 표정을 읽을 수 없지만, 그의 소식을 듣는 상대방이 더 상심한 표정이다. 시오자와는 시장과 독자를 분석해 만화가에게 팔리는 만화를 만들라고 조언하기보다 갈팡질팡하는 만화가가 중심을 잡도록 독려하는 타입의 편집자였다. 판매 부수로 평가받는 만화계에서 극단적으로 이상적인 편집자랄까. 이점이 그의 장점이자 약점이다. 그런 시오자와가 만화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직장동료와 담당했던 만화가들, 소장하던 만화책까지, 만화와 관련된 모든 것과 작별을 고했으나 실패로 끝난다. 그를 붙잡는 건 여전히 그를 사로잡는 만화라는 꿈, 꿈같은 만화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다. 시오자와는 이제 방향키를 돌려 퇴직금으로 만화잡지를 만들고 연재 만화가를 섭외할 것이다. 그중엔 훨씬 이전에 ‘자신의 만화’로부터 도망치거나 혹은 시류에 편승한 작가도 있다. 누군가에겐 만화는 젊은 날의 실패, 불씨가 꺼진 열정,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일지도 모른다.
만화가 옆 편집자
<동경일일>은 시오자와의 드림팀 만들기에 편집자와 만화가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편집자-만화가는 연재를 목표로 달리는 동반자지만 실무자와 창작자로서 입장 차가 있다. 소위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는 만화가와 만화가로부터 연재분을 끌어내야 하는 편집자의 관계는 상충하기도 상호보완적이기도 하다. 인기가 없으면 차기작을 보장할 수 없는 만화업계에서 시오자와의 이상적인 성향은 편집자들 사이에서 타산지석이 되기도 한다.
작중 편집자-만화가 파트너로 등장하는 하야시-아오키 콤비가 신인의 불협화음을 거쳐 안정화되고 성장한다면, 시오자와와 초사쿠 콤비는 초심으로 돌아가려는 중견의 몸부림과 인내를 보여준다. 만화가의 직업적 수명을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에 장래가 불안한 만큼 작품 하나를 준비하고 만드는 과정은 사뭇 비장해서 만화가-편집자는 생존을 함께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작품의 인기가 많으면 좋겠지만 인기가 없어도 의미는 있다. 시오자와라는 편집자가 만화가에게 보내는 찬사가 뭉클한 건 작품의 본질을 포착하고 존중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작가는 행복할 것이다.
동경, 혹은 짝사랑
동경(東京)과 동경(憧憬)이 동음인 것은 우연일까. 시오자와는 아름다운 만화를, 그것을 만든 만화가를 동경한다. 작중 시오자와는 타성에 젖은 만화가 초사쿠에게 애정 어린 비판을 하고 눈물짓는다. 시오자와의 눈물에 공감하는 건, 동경은 지금은 없는 것을 그리워하는 것이고 우리는 예전에 본 만화를 이따금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오자와의 기획처럼 인기순위와 매출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감동과 재미를 공유했던 작가-독자 관계는 발표의 장이 있다면 다시 소통할 수 있다. 몇 해 전 네이버웹툰에서 연재된 ‘한국만화1990’, ‘한국만화거장전’을 통해 활동이 뜸해진 작가들의 신작을 오랜만에 감상할 수 있었다. 장기 프로젝트는 아니었지만, 작가들의 여전한 개성과 열정은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작가들의 차기작을 기대했었다.
한편, 국내 만화부문 베스트셀러 대부분은 일본만화가 차지하는데 면면을 살펴보면 장기연재 중인 신간부터 신인 작가의 작품, 인기작가의 삽화집까지 다양하다. 구매력 있는 소비자로 분류되는 1020 독자는 OTT나 영화관을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을 접하고 출판만화로 관심을 옮기고, 일본만화작가의 내한 팬미팅과 전시를 관람하는 등 동경하는 만화를 적극적으로 즐기고 있다. 국내 웹툰 제작 편수가 범람하는데 왜 망가의 인기는 점점 높아지는 걸까? 웹툰 플랫폼과 에이전시는 기존 독자들의 수요를 반영하는 게 우선이겠지만, 잠재적인 독자를 유입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작품을 수용한다면 잠재력 있는 작가를 발견 혹은 재발견하고 한국만화의 다양성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때보다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
다시 <동경일일>로 돌아가면, 작중 시그니쳐라 할 수 있는 전경을 담은 엔딩 컷은 하루를 마무리하듯 야경을 자주 담는다. 인물에게 밀착하다 전경으로 비약하는 장면은 작은 하루하루가 모여 한 사람의 인생을 이루고, 한 사람의 인생이 세상을 이루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 같다. 마지막 화, 시오자와가 여정을 끝내고 소회를 밝히며 <동경일일>의 주제가 드러난다. 지면으로 옮길 수 없지만, 그의 말에 공감하는 건 우리 역시 과정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목표나 꿈을 포기했다고 불행한 삶이 아니다. 주어진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마츠모토 타이요 작가는 그동안 자못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세상을 그려왔지만 <동경일일>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을 다양한 시점으로 표현한다. 각자의 과정을 묵묵히 지나가는 평범한 이들의 ‘OO일일’을 응원하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