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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지탱하는 노동이, 도리어 우리를 죽음으로 밀어 넣을 때

라듐 걸스(글, 그림 씨 / 이숲 출판) 리뷰

2025-01-10 김민경

삶을 지탱하는 노동이, 도리어 우리를 죽음으로 밀어 넣을 때

  사고는 어디에서나 벌어진다. 그러나 산업 재해가 지닌 비극성은,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노동이 도리어 그들을 죽음으로 밀어 넣는다는 낙차로부터 발생한다. 프랑스 작가 CY의 그래픽 노블 <라듐 걸스>, 라듐이라는 물질이 발견되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20년대에, 미국의 여성 도장공들이 겪은 사고가 라듐 중독이라는 산업 재해라는 사건으로 빚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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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듐 걸스>에 주로 사용된 색상은 보라색과 옅은 초록색으로,
색상 반전을 통해 보라색이 내는 빛은 꼭 어둠 속에서 라듐이 내는 푸르스름한 빛을 떠오르게 한다.

  <라듐 걸스>의 시작은 무척이나 경쾌하다. 미국 라듐 회사에서 도장공으로 새로 일하게 된 신입 에드나는 그레이스를 비롯한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입술로 붓끝을 잘 모아서 페인트를 살짝 묻히고, 시계에 숫자를 하나씩 색칠하는단순한 업무를 맡게 된다. 라듐의 영향으로 이들의 옷과 치아와 손톱은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며, 외부 사람들은 이들 라듐 회사의 여성 도장공들을 고스트 걸스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된다.

  독특한 별명을 제외하면 이들의 일상은 여타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루한 근무를 마치고 파티에 가서 춤을 추고, 유행하는 영화를 함께 관람하며, 유원지에 놀러 가 수영을 하고 대관람차를 타기도 한다. 와중에 당시 미국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여러 언급-금주법, 여성 투표권, 여성 수영복 길이 단속 등-이 계속하여 등장하는 것은, 이들이 당시의 여타 시민들과 다르지 않은 시간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을 테다.

  명랑하던 작품의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은 그들 중 한 명인 몰리가 사망하면서부터이다. 아니, 몰리만이 아니다. 고스트 걸스라고 불리던 이들 라듐 다이얼 사의 도장공들은 차례로 이가 빠지고 발과 허리를 비롯한 부위에 알 수 없는 통증을 겪게 된다. 한참이 지나서야 이러한 증상들이 자신들이 한때 했던 도장 작업으로 인한 라듐 중독으로 인한 것이었음이 밝혀지지만, 이미 건강은 돌이킬 수 없이 나빠졌으며 치료법도 없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다.

  앞서 지나가듯 가볍게 언급되던, 아플 수 있다며 붓을 입술로 정리하지 말라던 폰 소쵸키 사장의 대사는 그제야 무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고스트 걸스가 라듐에 중독된 건 그저 그들이 부주의했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회사는 자신들의 제품이 인체에 전혀 해롭지 않음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으며, 자신들의 작업이 인체에 해롭지는 않은지 묻는 그들에게 팀장은 그럴 일은 없다며 딱 잘라 부인하였다. 폰 소쵸키 사장은 해임되었으며, 신임 사장인 아더 로더를 비롯한 주요 관계자들은 유럽 휴가 기간을 핑계로 재판에 참석하지 않았다. 52쪽에서 작가 CY는 마스크를 비롯하여 작업복을 제대로 착용한 채 주의를 기울이는 위층의 연구원들의 모습을, 아래층에서 그 어떤 보호 장구도 지급받지 못한 채 붓으로 입술을 정리하는 여성 도장공들의 모습과 선명하게 대조시킨다. 관계자들이 정말로 아무것도 알지 못했는지 독자들이 의구심을 갖게 되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괜히 싸운 게 아니어야 할 텐데.”(115). 처음으로 시계판을 칠한 날 죽음으로 가는 문이 열린 거라며 고스트 걸스는 회사를 상대로 재판을 신청하지만, 수명이 몇 개월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재판이 끊임없이 지연되자 결국 그들은 회사와의 합의를 택하게 된다. 그렇더래도 그들의 소망대로 그들의 싸움은 역사에 분명한 발자국을 남겼다. 이들의 일이 전례로 남은 덕택에 다른 라듐 중독의 피해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승소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발자국들이 하나둘 모여 미국 노동법이 개정되는 거대한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이들 고스트 걸스가 이름 그대로 유령의 모습으로 신임 사장 아더 로더 앞에 나타나 깔깔거릴 수 있었던 건, 회사의 바람과 달리 그들의 행동이 괜한 게 아니라 의미가 있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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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 재해라는 의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김성희와 김수박의 르포 만화 <문밖의 사람들>을 함께 권한다. <라듐 걸스>가 장기간에 걸쳐 증상이 나타나는 라듐 중독 사례를 통해 산업 재해가 조용하고 지독하게 삶에 스며드는 과정을 그린다면, <문밖의 사람들>은 파견 노동 문제와 메탄올 중독 실명이라는, 무관하지 않은 두 건을 다루며 표면적으로는 안타까운 사고로 보이던 일이 산업 재해라는 사회적 사건으로 의제화되기까지의 과정을 무척이나 상세하게 전달한다. 표지에 책의 제목을 점자로 표기하여 당사자들과 그를 비롯한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도록 외적으로 신경을 쓴 면 또한 깊은 인상을 남긴다. 디지털 만화규장각 동일 코너에 게재된 성상민 만화평론가의 리뷰 링크를 첨부한다(https://www.kmas.or.kr/webzine/review/202408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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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쌀쌀한 12월의 초에 다가올 20251월 업로드될 원고를 쓰며, 그때는 모두가 지금보다 더 안온한 미래를 살아가고 있기를 빌어본다.

필진이미지

김민경

만화평론가
2021 만화평론공모전 최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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