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2년에도 혼자를 기르는 법 같은 건 모를지라도
12월 3일의 한밤중 소란(계엄) 덕에 2016년과 2024년의 평행이론설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콜드플레이 내한 공연 발표, 올림픽 한국 종합 8위, 한강 국제 문학상 수상, 롤드컵 페이커 우승, 트럼프 당선, 대통령 탄핵 소추안 발의….(Adorukun, “재조명되는 2016-2024 평행이론”, X, 24.12.04, https://x.com/adorukun/status/1863998355669700613?t=DRoR1xYnbGuPSTRfF3W9Vg&s=19.)
평범한 우연이라기엔 희박한 확률로 겹친 국가적 규모의 우연에 놀란 가슴이 진정되기도 전에, 개인적 차원에서 평행이론의 근거가 또 하나 늘었다. 2016년에 열의를 다해 읽은 만화 <혼자를 기르는 법>(김정연, 카카오웹툰)을 2024년에 다시 찾아 읽은 것이다. 적어도 이것은 우연이 아니긴 했다. 암울한 개인사와 암담한 사회사가 서로 어느 쪽이 더욱 장래 없는지 경쟁하는 계절에, <혼자를 기르는 법>만큼 그 기분을 잘 대변해주는 만화도 없었기 때문이다.
<혼자를 기르는 법>을 처음 읽은 것은 2016년의 페미니즘 리부트 흐름 속에서였다. 이 만화는 성적으로 대상화되지 않은, 공들여 못생긴 포인트 벽지가 있는 '진짜' 여성의 방을 그렸다. 당시의 내가 거쳤고 앞으로도 거쳐갈 자취방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집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그 작고 불완전한 방 안을 채운, 피곤하고 가난하며 두려움이 도사리는 주인공의 일상 역시도 그 당시 내 삶을 이입하기에 어색함이 없었다.
그 2016년이 벌써 8년 전이라는 사실과, 그렇게 거진 열 살을 더 먹고도 여전히 혼자를 기르는 법을 모른다는 사실 중 어느 쪽에 더 놀라야 할지 모르겠는 2024년이다. 이번 연말도 영하의 거리에서 탄핵을 외치게 된 시국 또한 놀라운데, 어느 쪽이든 우울한 상상을 멈추기 어렵다. 냉소와 자기혐오가 계속된다.
다시 만난 주인공 '시다'는 2016년의 기억보다도 나 자신과 닮아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생각이 많아 보인다는 점이 그랬다. 만화는 나레이션 형태인 시다의 독백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나레이션은 비유로 가득 차 있다. 8시간 가동 원칙을 준수하는 중장비를 보며 "오늘도 중장비보다 오래 일했"다고 생각하거나, 매일 라면이나 먹고 있는 형편에 식품구성탑은 마치 바벨탑처럼 인류가 정복하기 힘든 탑이라 이야기하는 식이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 자신의 생존과 연관된 도시 속의 온갖 파이프를 상상하기도 한다.
시다의 이런 모습은 그가 길에서 마주친 사물 하나에도 인생과 사회를 투영하고, 한 끼의 식사에도 인류를 떠올리며, 보이지 않는 너머의 시스템을 상상하는 데 익숙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로 머리엔 무겁고 복잡한 세상 전체를 얹고 다니는 시다를 보고 있으면 혼자, 그러니까 한 개인의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회의 현실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시다의 고민과 다소 암울한 상상들이 쉬이 해소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찬찬히 마음이 가라앉기도 한다.
대체 평소에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하는 걸까.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들고, 실제로 시다가 늘 지쳐 보이는 것은 단지 중장비보다 오래 일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바로 딱 시다처럼 생각 많은 사람이기에 지레짐작할 수 있다. 한 주, 하루, 한 끼를 해결하는 것에 일일이 귀찮음과 버거움을 느끼는 그의 모습이 결코 낯설지 않았다. 식품구성탑을 바벨탑에 비유하는 에피소드만큼이나, 적당히 때우려 들어간 햄버거집의 이름이 '시지프'였던 장면이 유난히 반갑고 공감되었던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돈과 시간은 없고 고민만 많은 사람에게는 식사 한 끼를 해결하는 일조차 매일매일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영원한 형벌처럼 느껴진다. 그 무력감을 너무도 직관적으로 표현해주었다.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화는 '매일의 승리'라는 에피소드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것은 결국 내일을 위해 오늘을 양보하라는 뜻인데, "모든 감정은 오늘의 나만이 지니고 있으"니 매일매일 내일로 떠넘기며 승리를 거머쥐자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렇게 미루고 미룬 끝에 예정되어 있는 것은, 그렇지만 괜찮은 미래 같은 것이 아니다. 시다는 "패배하지 않는 매일을 살다가 인생 가장 마지막 날의 저는... 일을 모두 끌어안고 자폭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냉소적이고도 현실적인 말이야말로 이 장면을 좋아할 수 있는 이유다. 매일같이 일을 미루는 대책 없는 사람도 오늘의 정신 승리가 더 나은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럼에도 내일보다는 오늘의 승리를 택하겠다는 시다의 말이 한층 더 결연하게 들린다. 맨 마지막 날 모든 것을 이고 자폭하겠다는 말에 해방감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매일매일 나눠 처리해야 했던 인생의 피로와 고통이 일시불로 한 번에 지불될 수도 있다는 상상은, 복잡히 얽히고 꽉 틀어막혀 쉽게 해소되지 않는 현실을 사는 시다와 나 모두에게 너무도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답변 없이, 사실상 질문과 고민의 연속인 <혼자를 기르는 법>을 읽는 시간이 위안이 됐던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무덤덤한 얼굴로 그럭저럭 일상을 대처해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사실은 속에 얼마나 많은 불만과 의문을 가지고 있는지 엿보는 것만으로 나 자신을 잠깐이나마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 <혼자를 기르는 법> 3화. 시스템 중
2024년에 작품을 다시 읽으며 알게 된 것은 내가 완결까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매일매일 대답 없는 질문을 하는 것 같던, 질문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실은 불만을 말하는 것이었던 그의 독백에도 힘줘 새긴 마침표가 있었다는 것을 아주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을 오래 붙든 것은, 윤발이의 장례식 후 돌아오던 길에 휴게소를 들른 에피소드였다. 공황으로 인해 도로 위의 시간을 견딜 수 없던 시다는 이웃집 언니 '해수'와 휴게소에 멈춰선다. 도저히 괜찮아지지 않아서 결국 휴게소를 떠날 수 없게 될까 봐 겁에 질려하는 시다와 그런 시다를 달래는 해수가 나눈 대화가 좋았다. 내게도 삶이 거대한 휴게소처럼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기진맥진한 채로 마지못해 들렀으나, 두려움 탓에 쉬지도 못하는 공간. 그러나 그런 곳에서도 아주 "쪼끔"의 회복이란 건 가능해서, 시간이 지난 뒤 "목적지가 휴게소인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용기 내어 받아들일 수 있는 때가 오기도 한다. 지난한 2024년이 결국 끝나듯, 소란한 정세에도, 우리 각자의 혼자를 견디는 시간에도 끝이 있다는 것. 미약할지라도 그 사실이 가끔은 의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