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싸 병맛’의 진수
비둘기가 유해조수로 지정된 지 15년이 지났다. 개체수가 너무 많은 지역에서 사람들이 어떤 피해를 입는지도 알고, 우리 집 베란다가 비둘기 모임 장소가 되어서 한동안 고통받은 적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비둘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구룩구룩 소리가 귀엽게 느껴질 때도 있고, 목 빼면서 걷는 태가 웃기기도 하다. 엄마가 비둘기들이 못 오게 하려고 베란다에 버드스파이크를 설치하자 보복이라도 하듯이 일제히 베란다에 똥을 갈겨놓고 구구거릴 땐 경외심이 들기까지 했다. ‘이 자식들, 새대가리가 아니구나…’ 그 이후로 길거리에서 비둘기를 보면 왠지 구경하게 됐다. 무슨 생각하면서 보도블럭 사이에 낀 과자 부스러기를 쪼아먹고 있을까? 그리고 최근 내 관찰 활동에 추가된 루틴이 있다. 혹시 그 중에 한 마리가 헌서는 아닐까 생각해보는 일이다. 웹툰 <성북구 비둘기 이헌서>를 보면서부터다.
스물 넷 대학생 헌서는 중고거래를 하러 나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비둘기가 되어 있다. 인간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한 헌서는 같은 동네 남사친 반휘혈의 집에 머물며 비둘기로서의 삶을 살아보게 된다.
일종의 빙의물인데 어쩔 수 없이 남사친의 집에서 지내게 되는 로맨스 클리셰가 가미된다. 그리고 하필 비둘기? 이건 뭔가 싶다. 작품 소개를 보면 개그, 공감, 캠퍼스, 청춘, 병맛, 빙의, 동물 등 온갖 장르 태그가 달려 있다. 그런데 만화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이 만화의 메인 장르는 ‘병맛’이다.
그럴싸 병맛
일반적으로 ‘병맛’이라 함은 과장된 캐릭터와 상황, 논리를 배제해버린 예상치 못한 전개로 웃음을 주는 장르다. <마음의 소리>, <이말년씨리즈> 등이 대중적으로 사랑받은 초기 병맛이다. 병맛이 하나의 트렌드 혹은 장르적 키워드로 여겨지게 되면서 스토리물에 병맛 감성이 가미되는 형식의 작품들이 등장했다. 손하기 작가의 <오늘의 순정망화>, 컷부 작가의 <이십팔세기 광팬> 등이 비교적 최근에 연재된 병맛 스토리물이다. 이 두 작품은 전체적인 스토리 자체는 탄탄한 짜임새가 있고 캐릭터의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에피소드 형식 병맛물과 다르다.
<성북구 비둘기 이헌서>는 병맛 스토리물이라는 점에서는 해당 작품들과 유사하나, 전개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개연성을 파괴하는 대신 비현실적인 사건에 지나친 개연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병맛 감성을 낸다. 사람이 비둘기에 빙의해 어쩔 수 없이 비둘기인 상태로 한참을 살아간다는 터무니없는 설정에서 출발해 그럴싸한 전개를 지속하는 것이다. 주인공 헌서는 아버지를 닮아 긍정적인 마인드의 소유자로, 비둘기가 되어버린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는다. 자기가 헌서라는 걸 휘혈에게 알리기 위해 발에 물을 묻혀 발매트에 글씨를 쓰고 노트북 자판을 부리로 쪼고 결국 모랫바닥에 글을 써서 휘혈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부모님을 설득하고, 그 다음엔 날기 연습을 하고, 똥을 아무데나 싸지 않기 위해 바디 스캔 명상을 시작하고, 돈을 벌기 위해 비둘기 항공 촬영 서비스 따위의 사업을 구상하고… 헌서의 계획과 선택, 그리고 그 계획의 실패와 성공이 상당히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우리가 언젠가 비둘기가 된다면 참고해야 할 정도다. 나는 이 병맛을 ‘그럴싸 병맛’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비전형적인 개그 레퍼토리에 스며들기
웃음의 주안점도 허탈하게 예측 불가한 전개보다 캐릭터와 상황 묘사 방식 쪽으로 쏠린다. 가장 두드러지는 개그 레퍼토리는 실사 비둘기 그림의 사용이다. 귀엽게 디자인된 비둘기 캐릭터가 계속 나오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사진 수준으로 현실적인 비둘기 그림을 박아버리는 식이다. 헌서가 휘혈의 노트북 자판을 부리로 두드리는 모습을 휘혈이 목격할 때나 휘혈과 후배 소연이 같이 걸어가는 걸 지켜보면서 복잡한 감정을 느낄 때쯤, 헌서가 지금 비둘기라는 사실을 강렬하게 상기시켜준다. 아주 만화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인물일수록 대충대충인 작화를 바탕에 두고 대단히 사실적인 비둘기 묘사를 대비시켜 당혹감을 극대화시킨다.
또한 개연성을 개그 포인트로 연장시키기도 한다. 헌서의 날기 연습을 위해 아침마다 헌서와 함께 낙산공원에 갔더니 휘혈의 운동량이 20%나 증가해 근육세포는 7% 성장, 폐활량은 3.7% 증가, 스트레스지수는 평균 20% 감소, 뇌세포 개수는 무려 3만 개가 증가했으며 미모 또한 미묘하게 증진되었다는 진술이 그 예다. 날기 연습을 도와주다가 휘혈이 건강해지고 잘생겨졌으며, 그 때문에 학교에서 그에게 호감을 가지는 학우가 늘었다는 설정은 어처구니없게 논리적이어서 웃음이 난다.
더불어 비둘기의 삶에 대한 깊은 탐구가 바탕이 되어 작품 내 세계관에의 몰입을 유도한다. 헌서는 귀소본능 때문에 본가에 갔다가도 성북천으로 되돌아오고, 괄약근이 없어 똥이 그냥 나와버려서 민망해한다. 시야각이 넓어 화면을 보면서 머리로 노트북 터치패드를 조작할 수 있다는 것, 머리와 부리를 사용해 타자를 칠 때와 발가락으로 타자를 칠 때 가동범위가 어떻게 되는지까지 비둘기의 입장을 지나칠 만큼 디테일하게 제시한다. 회차마다 ‘작가님 지금 사람이신 건 맞냐’, ‘헌서가 그림 그리고 휘혈이가 타이핑 치는 중인 것 같다’ 등의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의도적으로 작품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는 연출도 동반된다. 헌서를 경계하던 두 오리의 모습을 실제 성북천 오리 사진으로 보여주고, 성북천에서 목욕하는 비둘기 무리 사진을 삽입하고 ‘누가 헌서일까요?’라는 텍스트를 넣는다. 자꾸 이러니까 내가 비둘기 무리를 볼 때마다 헌서인지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힐링물로서의 병맛
비둘기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헌서는 생각한다. ‘근데 오랜만에 건강한 생활을 해서 그런가? 열심히 운동하고 배불리 식사 후 자연 속에 있으니… 꽤나… ‘갓생’같군.’ 헌서가 자연의 일부로서 먹고 싸고 움직이고 성북천에 몸을 담그는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자연스럽고 옳게 느껴진다. 작품을 보다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독자 반응에서 <성북구 비둘기 이헌서>의 생태주의적 힐링물로서의 잠재력을 실감할 수 있다. 병맛 장르는 탈출구 없는 경쟁사회에서의 해방감을 제공함으로써 인기를 얻었다고 여겨진다. <성북구 비둘기 이헌서>는 (사람이었던) 비둘기의 삶에 동화되게 만들어 치유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병맛 만화와 결을 같이 한다.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던 성북동 비둘기가 여기로 온 걸까? 성북천변 비둘기가 살아가는 서울 이야기가 계속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