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눈으로 보고 흑색으로 위장한 소설적 만화
- 아메 데용의 만화 <파리대왕: 그래픽 노블> 읽기
합의된 이상이 갈가리 찢어지는 파국을 겪어본 적이 있는가? 그 참혹한 파멸 앞에서 끝내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보(고야 말)았다면,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1954)으로부터 얻는 감명이 각별하리라고 생각한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으로 널리 알려진 이 소설은 굳이 그 명성에 의존하지 않아도 인간 공동체가 한 번쯤은 경험하기 마련인 어떤 분열과 좌절의 경험을 흥미진진하고도 재미나게 형상화한 걸작이라 평할 만하다. 이 호평은 과장이 아니다. 소설 『파리대왕』은 시공과 장르를 초월하여 계속 읽히고 재해석됨으로써 인간 본성을 통찰하는 한 중요한 렌즈로 조탁되어 왔다. 이 렌즈는 영국의 피터 브룩 감독과 미국의 해리 훅 감독이 연출한 카메라 렌즈를 통해 각각 1963년 작 흑백 영화와 1990년 작 컬러 영화로 각색된 바 있다. 전자가 소설의 이야기를 비교적 충실하게 전달하는 흐름 속에서 아역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인간의 광기 서린 야수성을 날것 그대로 연출하는 듯한 후반부 장면을 강점으로 보유하고 있다면, 후자는 전자가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 굳이 컬러 영화로 재탄생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운 감이 있었다.
소설 <파리대왕>을 다시 읽는 작업으로서 아메 데용이 각색하고 그림을 그린 만화 <파리대왕: 그래픽 노블>(이수은 옮김, 민음사 / 2024, 이하 이 글에서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 것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힌다.)을 만나게 된 일은 큰 기쁨이다. 원작 소설에 대한 비평과 논문이 이미 상당 분량 축적된 지금 상황에서 이 소설/만화의 문학적 의미를 세세히 논하는 작업을 이 글에서 굳이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 작업보다 더 절실히 요청되는 작업은 『파리대왕: 그래픽 노블』이 만화로서 발휘하는 특질이 무엇이고 그 만화적 화법이 원작 소설의 의미와 가치를 지금 이곳의 해석적 지평에서 다시 음미하는 데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가늠하는 작업일 터이다. <파리대왕: 그래픽 노블>을 만화로 즐길 수 있게 된 것을 기쁨이라 표한 이유는 이 만화가 원작 소설의 정감을 유지하면서도 영화의 화술과 그림의 표현력을 모두 구유하고 있다는 판단에 있다. 이 만화에서 영화적 화법과 그림 이미지의 표현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전자는 (익스트림) 클로즈업 쇼트와 익스트림 롱 쇼트로 양분되어 활용되고, 후자는 검은색을 통해 인간의 악한 공격적 본능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익스트림) 클로즈업 쇼트는 인물의 안면에 집중적으로 사용됨으로써 대립으로부터 솟아나는 복잡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소년 무리의 갈등은 랠프와 잭의 의견 충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무인도에서 불을 피워 그 불의 연기로써 구조선을 유도하자는 랠프의 이성적 주장과 무인도에서 짐승을 사냥하여 고기를 먹자는 잭의 본능적 주장은 시종일관 첨예하게 엎치락뒤치락한다. 이 팽팽한 대결의 중간에는 랠프의 참모격인 ‘뚱보’(=‘피기’ / 작중 인물인 뚱보는 소설의 영어 원문에서 “Piggy”로 표기되어 있다. 유종호는 자신이 한글 번역한 <파리대왕>(민음사, 2002)에서 “Piggy”의 영어적 어감을 그대로 살려서 ‘피기’로 옮겼다. 이 글에서는 원작 소설의 인물 명칭인 “Piggy”가 이수은과 유종호에 의해 각각 “뚱보”와 “피기”로 번역된 두 양태를 모두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이 동일인물의 특성을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가 거의 늘 끼어 있다. 뚱보는 올바른 원칙을 직언하는 지식인의 역할에 값한다. 랠프가 회장으로 당선된 후에 섬을 탐사하는 데 적합한 인물을 뽑는 과정에서 그 탐사대원에 자원하는 뚱보와 뚱보의 자원을 말리는 잭의 대립은 클로즈업 쇼트의 화술에 힘입어 한층 날카롭게 강조된다. 날씬한 체형의 파괴자 잭과 통통한 체형의 현자 뚱보는 그 외모와 성격에서부터 충돌이 예견된바, 뚱보를 윽박지르는 잭의 험악한 얼굴과 그런 잭에 겁먹은 뚱보의 얼굴은 클로즈업을 통해 긴장된 분위기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클로즈업 기술은 익스트림 클로즈업 쇼트의 형태로 발전되어 활용되기도 한다. 무인도에서조차도 소년들의 놀림을 당하게 돼서 속상한 마음에 눈물이 고이고 만 뚱보의 눈가가 그려진 장면은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적실하게 활용된 사례라 할 만하다.
익스트림 클로즈업 기법의 정반대 지점에서 익스트림 롱 쇼트도 훌륭히 제 역할을 해낸다. 아메 데용은 소년들이 불시착한 무인도를 창공에서 내려다보듯 익스트림 롱 쇼트의 시선으로 그림으로써, 소년들이 처한 고립된 상황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무인도를 탐사하다가 그 섬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선 랠프, 잭, 사이먼이 왜소한 검은 실루엣으로 그려지는 가운데, 그 셋을 둘러싼 섬의 광활한 원시적 자연 풍광이 익스트림 롱 쇼트의 연출을 통해 가히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이 외에도 (직)부감 쇼트와 앙각 쇼트의 화술도 풍부하게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왜 거대한 자연 풍경 속에서 소년들은 ‘검게’ 칠해져야 했을까? 흑색이 연상시키는 “인간의 마음속 어둠”(327쪽)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연(nature)의 원초적 환경에 직면한 소년들이 인간의 사악한 본성(nature)을 참혹하게 표출하는 것이 소설/만화의 내용 아닌가. 소년 공동체가 최초로 수립했던 민주적 규칙으로서의 소라고둥은 결국 산산이 부서지고, 잭을 대장으로 삼은 사냥단 소년들은 다른 소년들을 위협하거나 공격할 때 전부 흑색으로 위장칠된다. 검은색 이미지의 이 표현력까지 감득하고 나면, 왜 이 소설/만화의 제목이 ‘파리대왕’인지가 자명해진다. “파리들의 대왕”(240쪽)으로 불리는 참수된 야생돼지 머리가 “검은 공 같”(240쪽)다고 비유된 가운데, 새까만 사냥단 소년들이 둥글게 모여 춤추지 않는가. 인간 악의 부패한 민낯을 인간 그 스스로가 거대한 파리로 변하여 체현하고 있는 형국이요, 나무창에 효수된 돼지머리는 그 작은 악마들로 짜인 갑옷을 입은 혼군(昏君)이다.
이렇게 <파리대왕: 그래픽 노블>은 쇼트의 시선으로부터 도움을 얻어 영화적 장점을 확보하면서도 흑색 이미지의 의미 표현력을 발휘하여 1963년도 흑백 영화의 무의미한 화면색을 넘어선다. 이러한 영화적 특징들뿐만 아니라, 원작 소설로부터 따온 문장들이 <파리대왕: 그래픽 노블> 속 분위기와 인물의 내면을 영화의 내레이션 또는 자막처럼 설명해주는 연출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 연출은 원작 소설과의 공통점을 만화에 부여함으로써 적당한 무게감을 잡아주면서도 그림만으로 환기할 수 있었을 효과를 일정 수준 차단하고 있다는 아쉬움도 남긴다.
아메 데용은 원작 소설의 내용을 약간 각색하기도 했는데, 바로 랠프가 무인도로 흘러오기 전의 평온했던 과거를 떠올리는 장면을 중간중간 삽입한 것이 그것이다. 무인도에서의 삭막한 생존과 문명사회에서의 풍족했던 생활 간의 대조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낙차를 담담하면서도 선연하게 자아내는 연출이라는 점에서 유의미한 각색이라고 생각한다.
만화의 결말은 자못 묘하다. 군인은 무인도 전체를 태워버리는 화마로부터 뿜어져 나온 연기를 보고서 무인도에 온다. 그 군인 앞에서 소년들은 엉엉 울부짖는다. 소년들의 구출이 마침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행복한 결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만화의 마지막 장면은 “순양함을 바라보면서”(332쪽) 마무리된다. 전투함의 존재는 인간의 파괴성이 가장 흉악하게 발현되는 전쟁의 가혹한 현실로 소년들이 돌아가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어른들 없는 세상”(12쪽)에서는 소년들의 자유가 바람직한 자율이 아닌 무절제한 파멸로 치우쳐 버렸다면, 어른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그럴듯한 명목을 겉으로 내세운 폭력이 교묘히 자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조작된 폭력이 합의된 이상보다 지리멸렬한 파국에 더 가깝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파리대왕: 그래픽 노블』이 인류에게 주는 울림도 오래도록 남으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