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와 관련한 다양한 감정들, 이를테면 두근거림
1.
요즘 새로운 관심사가 생겼다. 미술사, 그리고 아트컬렉팅이다. 관심이 생기다보니 서양미술사가 꽤 재미있다. E.H.곰브리치가 쓴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는 서양미술사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볼만한 책으로, 시대별 특징적인 미술 사조가 잘 정리되어 있다. 흔히 명화라고 불리는 유명한 미술 작품은 대체로 자연이나 사람들의 일상을 담고 있으며 시간을 초월하여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네덜란드의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는 일상 속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그렸는데 그 중 <연애편지>,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여인>, <편지를 쓰는 여인> 등 편지를 소재로 한 작품도 있다. 편지를 쓰는, 편지를 받는 사람의 감정을 화폭에 담았는데 그림을 찬찬히 보고 있자면 지금도 그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전화가 없었던 시절,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는 수고는 물론이거니와 상대방에게 편지가 전달되고 답장이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디지털 세상을 사는 요즘 우리는 그런 수고와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다. 이메일, 문자메시지, 전화 등 터치 몇 번으로 손쉽게 다른 사람과 연락한다. 기술 앞에서 번거로움은 생략된다. 동시에 편지를 쓰면서 느끼는 감정, 답장을 기다리면서 느끼는 애절한 마음도 함께 생략되었다. 이제 디지털이라는 하이테크(High-tech)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의 하이터치(High-touch)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일까?
2.
이 글을 쓰면서 편지를 둘러싼 인간의 감정이 생각보다 다양함을 새삼 느꼈다. 연애편지를 예로 들어보자. 편지를 쓰는 사람 입장에서 편지를 쓸 때, 편지를 전달하기 전에, 편지를 전달하면서, 답장을 기다리면서 느끼는 감정이 사뭇 다르다. 좋아하는 상대방에게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편지를 쓴다. 편지를 전달하기 전 다른 사람이 모르게 언제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하는 마음, 용기를 가지고 전달할 때 심장이 터질듯한 마음, 이제나저제나 언제 올 지 모르는 답장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마음이 그런 것이다. 편지를 받는 사람 입장은 또 다르다.
편지는 글을 쓰는 행위의 결과물이지만 동시에 편지에는 쓰는 사람의 진심이 담겨있다. 편지는 도달해야 의미가 있는 매체다. 도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자신의 감정을 글에 담는다는 점은 일기와 비슷하지만, 상대방에게 도달하지 않으면 편지가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기록한 일기가 될 뿐이다.
편지를 테마로 한 만화 <이 편지가 도착하면은> 골드키위새, 산호, 이공공구, 민지환, 안그람 등 젊은 만화가 5인의 테마단편집이다. 작가마다 개성 넘치는 시선을 그림체에 담아 스토리를 전개했다. 그래서인지 단순히 편지를 소재로 그린 만화라기보다는 편지를 둘러싼 다양한 감정이 작품 속에서 잘 드러났다. 골드키위새의 <인어의 연서>에서 편지를 쓰는 사람의 마음이 몇십 년이 지난 뒤 받는 사람에게 전달되었다면, 산호의 <완벽한 사람의 편지>는 편지를 받는 사람의 눈이 멀어 편지를 읽지 못하는 상황이 나온다. 이공공구의 <편지를 읽어줘>는 편지를 전달하기 전 소녀의 두근거리는 마음을 표현했다면, 민지환의 <동해를 위하여>는 시간을 초월하여 죽지 않는 여자가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난 남자에게 보내는 마음을 담은 편지를 선보였고, 안그람의 <예언의 수신인>은 여고 시절 함께 쓴 연애편지가 한참 지난 뒤 현재에서 어떻게 문제의 발단이 되는지 풀어낸다. 편지와 관련된 다양한 감정을 살펴보는 것이 무척 흥미롭다.
이 책의 또 다른 관전포인트는 작품 속 스토리가 독자의 경험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연애편지를 쓰기 전에 두근거리는 마음이나, 편지를 전달하고 나서 답변을 기다리는 마음, 편지를 받았을 때 좋으면서도 두근거리던 감정은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마음이다. 작품을 읽으며 자신의 경험을 떠올릴 수 있고 그때를 추억할 수도 있다. 자신이 겪었던 경험은 만화 속 편지를 매개로 지금 이 순간 독자의 머릿속에서 다시금 재현된다. 만화를 읽다 보면 컷 사용이 돋보이는 장면이 여러 군데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동해를 위하여>에서 밀정에게 잡히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다. 독립군 투사가 밀정에게 잡히는 장면을 생쥐가 뒤에서 사람을 덮치는 장면으로 표현하는데 한 페이지를 가득 메운 한 장의 컷에서 시대적 어두움과 상황의 긴박감,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상실과 안타까움이 복합적으로 느껴진다.
3.
말은 의도를 담는 그릇이다. “잘하고 있네”와 “잘~하고 있네”는 똑같이 다섯 음절의 말이지만 의도는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어떤 일을 잘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데 비해 후자는 잘하지 못한다는, 빈정대는 말투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뉘앙스 차이를 구분할 수 있지만 우리 말에 서툰 외국인은 뉘앙스를 구분하기 어렵다. 글도 마찬가지다. 행간, 문맥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의사소통 이론은 발화자와 수신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발화자는 메시지를 채널에 담아 수신자에게 보낸다. 수단에 생각을 담는 과정을 인코딩이라고 하고, 도달한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을 디코딩이라고 한다. 인코딩이 제대로 되었다고 해서 디코딩이 제대로 된다는 보장은 없다.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얼굴을 보면서 대화하는 것이 편지나 글, 문자메시지로 소통하는 것보다 나은 경우가 많다. 오해가 생길 때 특히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로만 전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이 글의 맨 처음 언급했듯이 편지는 아날로그 감성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인다.
만화 <이 편지가 도착하면은>은 편지를 보내는 이와 받는 이의 감정을 다양하고 진솔하게 독자에게 보여준다. 연말연시를 핑계 삼아 주변 사람에게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로 소식을 전하기보다 이왕이면 마음을 담은 편지로 연락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