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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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과 집착이 구현한 불완전한 불멸의 세계

꽃밭에서(글, 그림 유시진 / 한국만화거장전: 순정만화특집 네이버 웹툰 2015.)리뷰

2024-12-20 김진철

인간의 욕망과 집착이 구현한 불완전한 불멸의 세계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 즉, 정말 사랑하던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준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만날 것인가. 죽음을 인정하고 미련을 두지 않을 것인가. 웹툰 <꽃밭에서>에서는 기술의 발달로 “퍼스낼리티 클론” 시스템을 통해 죽은 사람들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만날 수 있다. 복제할 사람이 살아있을 때 DNA를 비롯한 각종 데이터를 스캔하여, 단순히 특정 시점의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디지털 클론을 구현한다.

  이 시스템은 단순히 사람을 복제하는 것을 넘어, 살아 있는 사람과의 소통도 가능하게 한다. 현실 속 인물이 VR과 같은 도구를 이용해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 만날 수도 있고, 문자와 영상통화도 가능하다. 다만, 시스템 속의 클론이 현실로 나오지는 못한다. 복제된 사람은 현실에서는 이미 사망한 존재지만, 디지털 세계 안에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시스템 속 클론은 자신을 살아 있는 존재라고 믿지만, 현실에서는 죽은 자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들은 산자도 죽은 자도 아닌 채, 이승도 저승도 아닌 경계에서 머물고 있다.

  웹툰의 주인공 서영은 하나 뿐인 아들 현우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디지털 클론을 만들어 소통한다. 그리고 아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서천꽃밭을 찾아가 시스템에 접속한다. 시스템 속의 아들은 실제 학교에 다니는 듯한 일상으로 어머니를 맞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프로그램화된 자신의 일상을 공유한다.

  ‘서천꽃밭’은 제주신화에 등장하는 공간으로 이승과 저승의 어디 쯤엔가 있다는 곳이다. 삼승할망은 서천꽃밭에서 자라는 꽃으로 인간들에게 생명을 잉태시켜 준다. 또한 이 꽃밭에는 온갖 능력을 갖고 있는 꽃들이 자라는데, 그중에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꽃들도 있다. 신화 속에서 한락궁이, 자청비, 녹디셍이는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에 이르자 서천꽃밭을 향한다. 그곳에서 뼈살이꽃, 살살이꽃, 피살이꽃, 숨살이꽃 등의 환생꽃을 얻어 생명을 되살린다. 그런 점에서 웹툰의 서천꽃밭 시스템은 신화 속 서천꽃밭의 현대적 재현이다. 그렇지만 신화에서 환생한 이들이 현실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반면에 시스템에 환생된 존재들은 디지털 세계에 갇혀있다. 계약이 끝난 뒤 삭제 버튼 클릭 한 번이면 한순간에 존재가 사라질 수 있는 덧없는 부활인 것이다.

탐욕과 집착의 콜라보

  디지털 세계에 재현된 존재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상황은 누군가에게는 탐욕의 대상이, 누군가에게는 집착의 대상이 된다. 서천꽃밭 시스템을 만든 회사는 최첨단 독점적 기술을 유지하는 것을 빌미로 고객들에게 많은 비용을 요구한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비용을 마련해 회원 신분을 유지하던 사람들도 점차 늘어나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한계에 이르게 된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줄을 선다.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경제적 능력만 되면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아슬아슬한 유혹이다.

 

△ 출처 <꽃밭에서> 중, 네이버 웹툰

  서천꽃밭 시스템을 만든 기업은 사람들의 사랑과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교묘히 이용해 탐욕을 채운다. 죽은 이를 되살리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며 사람들을 유혹하는 이 서비스는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집착을 부추긴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을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고, 사회에 사랑이 넘칠수록 잠재적인 고객들이 늘어나는 것이니 회사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이 없다. 돈을 내지 못하는 회원은 새로운 고객으로 교체해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서영은 아들 현우를 보고 싶은 마음에 서천꽃밭 시스템의 고객이 되었다. 하지만 그 비용을 감당할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들의 디지털 클론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더 이상 돈을 빌릴 곳은 없다. 헤어진 남편에게까지 돈을 갚으라는 독촉 전화가 간다. 회사에서는 비용을 대지 못하면 회원 자격을 취소하겠다고 최후 통첩을 하는 상황. 그 말을 듣는 주인공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회원 자격이 취소되어 더 이상 디지털 클론이 유지되지 못하게 되면 다시 한번 아들이 죽는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주인공의 선택은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장기매매라는 불법행위를 택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다시 살아난 디지털 세계 속 아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천국인가 파국인가

  웹툰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시스템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이 장기매매를 통해 비용을 마련하려고 한다. 서영은 법망을 피해 안전하지 않은 장소에서 장기를 적출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나고 만다. 서영은 그대로 사망하고 이튿날 시신으로 발견된다. 돈에 대한 인간의 탐욕과 죽은 자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결국 살아있는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서천꽃밭 시스템에는 아무 영향이 없다. 그녀의 빈자리는 곧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다른 회원으로 채워질 뿐이다.

  얼마 전, AI 기술을 이용해 사망한 연예인과 가족들을 만나게 해주는 프로그램이 방송된 적이 있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물론 프로그램에서는 특정 시기의 모습을 잠깐 재현하는 것이었다. 기술의 발전 속도를 고려할 때 웹툰 속 서천꽃밭과 같은 서비스가 머지않아 현실이 될 가능성도 있다. 과연 이러한 기술은 우리 사회에 천국이 될 것인가, 혹은 파국을 초래할 것인가?

필진이미지

김진철

동화작가, 만화평론가
《낭이와 타니의 시간여행》, 《잔소리 주머니》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