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별(星)로 와요, 이별(離別)로 와요
『이별로 와요』, 모래인간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별로 와요⟩는, 다소 흔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선의로 포장된 지옥으로 가는 길을 개척한 자의 고뇌와 책임을 묻는 내용에 가깝다. 그런데 어디 하나뿐이던가? 양쪽에 날이 선 칼로서의 과학을 소재로 하는 작품은 사실 무궁무진하다. 예컨대 소설 ⟨프랑켄슈타인⟩과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있다. 순수한 호기심에 이끌려 선을 넘고 끝내 파국을 맞는 주인공을 그린 이 두 작품은, 소설뿐만 아니라 공연 등 다양한 형태로 새로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선보여지고 있다.
적절하기로 따지자면 영화 ⟨오펜하이머⟩만한 예시도 없다. 자그마치 3시간이나 되는 이 영화는, 방대한 지적 열정과 넘치는 자긍심을 지닌 한 과학자의 여정을 그려낸다. 오펜하이머의 개인적인 삶과 제2차 세계대전 미국이라는 시공간을 리듬감 있게 교차시키며 한 인물의 삶을 압축적으로 그려낸 이 영화는,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성공했다. 이들 작품과 비교할 때 ⟨이별로 와요⟩만이 갖는 특징은 뭘까?

(6화. 마르마로스에서 지구를 관측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두 사람.)
주인공 이소하는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눈을 뜨니 낯선 행성이었고, 구조대원들을 통해 이곳이 마르마로스라는 이름의 사후세계(그러니까 저승)라는 걸 알게 된다. 세상을 떠난 삼촌 하투이 또한 이곳에 있었다. 유능한 과학자인 삼촌을 따라 이소하는 이곳에서 다시 한번 과학자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이승을 실시간으로 관측하게 되고, 지구에 있는 아들 지호가 생활고에 더해 학교폭력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소하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을 모아 이승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마르마로스로 데려오기로 하고, 이 사실이 알려지자 행성은 큰 혼란에 빠진다.
데뷔작 ⟨좀비를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부터 모래인간 작가는 하나의 선택이 곧장 다음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사고실험 같은 구성을 선보여왔다. 알록달록한 도미노를 정갈하게 배치한 후 차례대로 쓰러뜨리는 광경을 멀찍이 펜스 너머나 허공에서 바라보는 것 같다면 적절할까? 특정 인물에 강렬하게 이입하기보다는 작가가 설계한 무대를 멀리서 바라보며 주어진 상황에서 인물이 한 선택을 곱씹게 하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이별로 와요⟩도 마찬가지다. 모든 일의 시작은 분명 이소하지만, 동시에 작품은 더는 그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 상황을 다양한 관점에서 균형 있게 서술한다. 조카의 연구를 단호하게 반대하는 삼촌이자 연구소장 하투이, 이소하의 연구가 누구보다 간절한 동료 가비아와 그들을 지원하고자 하는 타미르를 비롯한 사람들, 자신의 죽음에 이소하가 얽혀 있음을 알게 된 서온과 소하의 연구실을 급습한 연옥론자 등등… 이소하로부터 비롯된 문제는 그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수평적으로 퍼져나간다, 마치 수면에 퍼져나가는 동심원처럼.
물에 떨군 돌멩이가 아니라 겹겹이 퍼진 동심원 그 자체에 집중한다는, 다시 말해 특정 인물의 전기(傳記)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별로 와요⟩는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 비로소 차이를 갖는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나 지킬 박사, 오펜하이머와 같은 인물은 분명 인간적이고 또 매력적이다. 답답하다가도 두고두고 뒷덜미를 선득하게 한다. 그 마력은 많은 이들을 불러들이는 동시에 그들 주위의 여러 겹의 윤리적인 딜레마들을 희석하고 당사자들을 일종의 아이콘으로 박제시키기도 한다.
⟨이별로 와요⟩는 이소하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우상화하지 않는다. 그라고 내적 갈등을 겪지 않는 건 아니지만, 자진해서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지는 대신 자신이 지은 매듭을 제 손으로 풀어낸다. 자신이 시작한 일을 끝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며, 자신의 욕심에 휘말린 서온이를 구하고 진심으로 사죄한다. 이소하는 고통에 겨워하는 창조적인 개인으로 남는 대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다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어른이 되려고 노력한다. 흔한 재난 영화의 결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과학이 지닌 이중적인 면을 다루는 작품이 견지해야 할 모범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작가 특유의 유머 감각이 더해지면서 전반적인 분위기가 마냥 처지지만은 않기도 하고 말이다.

(8화. 처음 마르마로스에 왔을 때를 떠올리며 실험 윤리를 되새기는 하투이.)
사실 ⟨프랑켄슈타인⟩과 ⟨지킬 박사와 하이드⟩, 그리고 ⟨오펜하이머⟩에는 하나 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주인공의 이름이 곧 제목이라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의 빅터 프랑켄슈타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헨리 지킬, ⟨오펜하이머⟩의 J. 로버트 오펜하이머… 그러니 이들 작품은 애초에 주인공의 일대기일 수밖에 없다. 같은 이유에서, ⟨이별로 와요⟩가 다른 노선을 취하리라는 건 제목에서부터 예견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번 글을 제목 얘기로 마무리하자. 의도된 것인지 알 길은 없겠지만, 제목 ⟨이별로 와요⟩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이 별(星)로 오라는 것, 그리고 이별(離別)로 오라는 것. 서술어 ‘오다’와의 호응을 고려하면 전자가, 띄어쓰기를 따지자면 후자가 더 어울린다. 두 가지 모두 틀리지 않은 건, 이 만화는 사람들을 새로운 별(정확히는 행성이지만)로 데려오려는 이야기이자 동시에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