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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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에 등장한 해칭의 파열과 탄성, <부두슬램>

웹툰 〈부두슬램〉은 해칭과 펜선 중심의 흑백 작화를 통해 웹툰 UI의 일방향 독해 방식을 깨고 전통 만화의 예술적 실험성을 복원하려는 작품으로, 산업화된 웹툰 생태계 속에서 매체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도전적 시도로 평가된다.

2025-10-17 이현재

웹툰에 등장한 해칭의 파열과 탄성, <부두슬램>

『부두슬램』, 도바Q

<부두슬램>(도바Q&스몽Z, 2025~)은 올해 하반기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부두슬램>2024년 네이버 지상최대공모전 1기 최우수상을 받았을 때, 최소한 나는 이 작품에 대한 기대를 걸지 않았었다. 그러나 연재를 시작 이후, <부두슬램>은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는데, 특히 딥포커스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세세하게 시도된 해칭과 잡지 만화에 어울릴 법한 프레임 편집을 웹툰에서 시도한다는 점이 주목할만했다. 데생과 해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작법은 웹툰 생태계에서 보기 드문 선택이다. 데생과 해칭을 작품 내에서 전반적인 기법으로 전개하면, 독자는 스스로 시선을 옮겨가며 적극적으로 작품에 개입해야 한다. 이는 독해 방향을 상하수직의 일방향으로 유지시키는 웹툰의 UI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에 가깝다. 이 불화는 작품을 매체와 충돌시킴과 동시에 감상에 파열을 일으키며,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감각의 활용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부두슬램>은 만화가 도달할 수 있는 표현의 정점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흥미로운 지점은 <부두슬램>이 처음부터 이런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상최대공모전에 <부두슬램>이 투고될 당시, 작품은 컬러를 중심 톤으로 잡고 있었다. 거친 펜선 묘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여느 웹툰처럼 클립 스튜디오를 활용한 다크판타지 세계관 기반의 능력자 배틀 장르물로 기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정식 연재된 <부두슬램>은 해칭을 통해 펜 터치를 강조하는 흑백 만화로 탈바꿈했다. 더불어 마치 00년대 서울미디어코믹스의 점프에서나 볼 법했던 연재 작품을 떠올리게 만드는 프레임 편집은, 이 작품이 웹툰이 아닌 전통적 만화로서의 정체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웹툰의 문법을 의도적으로 거스르고 있는 듯 보이는 <부두슬램>의 전략적 편집은 명암과 질감을 해석하며 작품에 개입해야 하는 독해 기법을, 스트리밍의 감각으로 가속된 독해 경험을 추구하는 웹툰의 매체성에 난입시킨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만든다.

[그림1. 장 클로드 갈의 <대성당의 비밀> 중 일부]

(출처: 알라딘)

<부두슬램>의 주요한 기법으로 활용되고 있는 펜과 해칭은 만화에서 오랫동안 작가적 야심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사후에 프랑스 문화부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예술 유산으로 지정된 작품들을 남긴 장 클로드 갈(Jean-Claude Gal, 1942~1994)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30여 년에 가까운 경력 안에서 단 5권의 만화책만 출판했을 정도로 프레임 하나에 극한의 공력을 들이며, 그의 작품은 오늘날 만화와 순수미술의 접점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주요한 레퍼런스로 활용되고 있다. 장 클로드 갈의 작품들은 모두 단독 작업을 통해 만들어졌는데, 극도로 세세한 펜 데생과 해칭을 추구하는 동시에, 정교한 구도들을 프레임마다 섬세히 배치해 프레임 안에서 극한의 복잡성을 실험한 기법적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장 클로드 갈의 만화들은, 만화가 순수미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섬세한 순수예술의 도구로도 발전할 수 있음을 증명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더불어 장 클로드 갈의 작품은 <베르세르크>와 같은 걸작을 남긴 미우라 켄타로에게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다. 미우라 켄타로(三浦 建太郎, 1966~2021) 역시 소묘 작품에 가까운 데생과 해칭 활용을 통해 중세 다크판타지가 묘사할 수 있는 풍경을 일본 만화의 특징들과 수려하고 탁월하게 접합시켰다. 그 역시 장 클로드 갈처럼 오랜 시간 특정 프레임에 극한의 공력을 쏟아붓는 작업들로 유명했으며, <베르세르크>가 가진 방대한 세계관에 어울리는 고유한 표현들과 기법으로 만화 애호가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베르세르크>는 연재된 30년 동안 일 년에 한 권이 출판될까 말까 하는 느린 진행 속도에도 불구하고 누계 발행 부수 7,000만 부 이상의 판매량을 올렸으며, 1권 제1쇄는 중고 플랫폼에서 130만 원으로 거래되는 소장 가치가 높은 장서로 인정받고 있다.

[그림2. 미우라 켄타로의 <베르세르크> 초반 11A급 중고본]

(출처: mercadi)

펜과 해칭으로 상징되는 고품질 작화는 만화 예술의 정점이라 할 만하지만, <베르세르크>의 느린 작업 속도가 보여주듯이 해칭을 연재 웹툰에 적용하는 일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웹툰은 일주일에 한 번씩 새로운 에피소드를 업데이트해야 하고, 독자들의 피드백을 빠르게 반영하며 이야기를 쌓아나가는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빠른 생산 주기는 웹툰 산업의 중핵이자 엔진 그 자체이지만, 동시에 창작자가 작품에 애정을 갖고 충분히 공을 들일 시간을 빼앗아 표현 기법의 제한을 가져오기도 한다. 네이버웹툰은 웹툰의 매체적 특성을 최적화하여 정점에 오른 플랫폼으로서, 대규모 트래픽을 통해 이야기 산업을 웹툰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 왔다. 특히 시선의 상하수직적 일방향성을 특징으로 구축된 UI는 단순히 플랫폼의 특성을 보여준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만화 생태계 전체에 거대한 파급효과를 일으키며 만화 매체의 혁신이라고 부를만한 상징적인 흔적을 남겼다. ‘웹툰 UI’는 웹툰이 가져야 할 형식과 구조를 규정했고, 수많은 창작자가 웹툰 UI’의 틀 안에서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에 대한 명암 또한 선명하다. 네이버웹툰은 만화 생태계가 창작 기반으로 다져진 산업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비판을 지속적으로 마주해왔다. <앵무살수>(김성진, 2020~2024) 등과 같이 만화적 특징들을 묵직하게 담아낸 걸작들을 꾸준히 발굴하며 플랫폼으로서 존재 가치를 입증해 왔지만, ‘박태준 만화회사로 대변될 수 있는 패스트 콘텐츠들의 양산이 생태계의 다양성을 해친다는 비난에 꾸준히 시달려야 했다. <부두슬램>은 네이버웹툰이 단순한 산업을 넘어, 독과점에 가까운 플랫폼으로 성장한 현 위치의 무게감을 실감하고 있으며, 그 책임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를 짊어지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이런 작품을 정식 연재한다는 결정 자체가 플랫폼의 태도를 드러낸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림3. <부두슬램>의 한 장면]

(출처: 네이버웹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두슬램>이 웹툰의 매체성과 어울리는 방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작품이 가진 단점 역시 선명하게 드러난다. <부두슬램>은 웹툰으로서 가독성이 대단히 떨어지는 작품이다. 이는 해칭을 주요한 기법으로 삼은 작품의 특성에 기댄 것으로, 웹툰에 최적화한 프레임 편집 등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워 보인다. 모바일 환경에서 감상해야 하는 웹툰의 특성상, 섬세한 펜 터치와 정교한 해칭을 통한 시선 설계는 오히려 독해를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앵무살수>와 같은 작품을 균형 잡힌 걸작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으나, 최소한 현 시점에서는 <부두슬램>의 도전에 더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무모한 도전은 유무형의 보상을 기대하기 힘들며, 이 때문에 이름 없는 희생으로 남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의 네이버웹툰 생태계를 지켜온 작품들은 <부두슬램>과 같은 작품들이며, 이 무모한 도전들이 만화 생태계에 다시금 탄력을 불어넣고 있다.

해칭은 절대 쉬운 도전이 아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공력을 요구하는 작업이 될 수도 있다. 장 클로드 갈과 미우라 켄타로가 증명했듯, 이 길은 창작자를 소진시킨다. 그러나 장 클로드 갈과 미우라 켄타로가 만화 예술의 경지에 오른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부두슬램>이 그 경지에 도달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작품이 웹툰 생태계 안에서 만화적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디 완결까지, 지금 보여주고 있는 작화의 품질을 유지해서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남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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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 연구원. 콘텐츠와 IT 산업의 동향과 정책을 연구하며, 콘텐츠 전반에 대한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국 AI 및 디지털 정책 동향 조사·분석」(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디지털 보안 동향 조사 및 분석」(한국인터넷진흥원) ▲「글로벌 게임산업 트렌드」(한국콘텐츠진흥원) 등에 참여했으며,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 신인상 △게임제네레이션 비평상에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