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엔 어디로 갈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김진, 서나래, 필냉이
내게 몽골이란
몽골에 다녀왔다. 최근 한국인들 사이에서 몽골 여행이 유행이란 말을 듣긴 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유행을 실천하기에는 게으른 성미라 전혀 염원도, 계획도 한 적 없는 일이었다. 뜻밖에도 유행에 탑승하게 된 것은 절친한 친구의 제안 덕이었다. 20살 때부터 알고 지내 어느덧 30대를 함께 맞이한 이 친구와 8박 9일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할 날이 또 올까 싶었기 때문이다. 몽골에 대해선 몸이 꽤 고생하는 여행지라는 단편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루하루 착실히 운동 능력을 잃어가고 있으니 이런 고생스러운 여행은 이번이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서, 몽골 자체는 내게 매력적인 여행지가 아니었다. 10년도 더 전에 읽었던 웹툰 <한 살이라도 어릴 때>를 통해 접한 몽골이 너무나 단조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 전에 나는 낢 작가의 네팔 여행기 <나는 어디에 있는 거니>를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사람도 건물도 복닥대는 네팔 여행기에 비해 몽골 여행기는 어딘가 좀 심심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한 편의 만화라는 건 자주 무심한 예상보다 힘이 세서, 서른이 될 때까지도 내게 몽골은 만화가 보여준 단조로운 몇 컷으로 기억되었다. 몇 시간씩 초원을 달리고, 자주 못 씻고, 동물들이 좀 나오는, 굳이 가야 할지는 모르겠는 곳. 작가님들이 들으면 무척 아쉽고 속상한 감상이겠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랬다.
몽골에서 몽골 여행기 다시 읽기
그런데 막상 몽골에 간다고 하니 제일 먼저 그 만화가 생각났다. 열흘 간의 몽골 여행을 위한 예습이 될 것 같기도 했고, 그때 그렇게 심심하게 읽혔던 만화를 새로 보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출국하는 비행기에서 프롤로그를, 입국하는 비행기에서 에필로그를 읽을 만큼, 서른 편도 안 되는 웹툰을 열흘간 천천히 음미하듯 읽었다.
10대 시절의 나는 그럭저럭 총명했는지 기억이 아주 틀리지 않았다. 그때 읽은 느낌 그대로였다. 복닥대거나 화려하기보다는 단조롭고 밋밋한 여행기였다. 세 명의 작가가 회차를 번갈이 가며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재잘거리듯 흥겨운 느낌을 주긴 했지만, 여행의 풍경 자체가 바뀌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여행을 다녀오면, 그곳에서 구체적인 누군가를 만나고 뭔가를 먹고 그래서 기억이 심어지고 나면, 세계지도를 볼 때 그곳만 불룩 튀어나온 듯한 경험을 우리는 한다. 몽골,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 칠레. 이렇게 가본 나라와 가보지 않은 나라들의 이름을 뒤섞어 열거해 보면, 자연스레 내가 가본 나라들에 눈이 간다. 밑줄이 그어졌거나 두꺼운 글씨로 써 있는 것도 아닌데 시선을 붙든다. 마치, 방금 열거하는 과정에서 가장 가까운 기억의 몽골을 제일 먼저 언급한 것처럼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나와는 다른 입체감으로 저 나라들을 읽었을 것이다. 어딘가를 여행했다는 것은 그런 의미니까.
몽골의 풍경을 내달린 뒤 접하는 만화도 꽤나 다르게 다가왔다. 어제나 오늘 내가 다녀온 곳이 그려진 만화를 저녁마다 읽는 경험이 좋았다. 이를테면 고비 사막. 구글 이미지로나 접하던 사막을 직접 가보지 않았다면 만화가 그린 사막 역시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고비 사막 회차를 읽을 때의 나는 이미 잔혹한 모래사막을 올라본 후였다. 대체 내가 뭘 잘못 했을까 참회하고, 길을 막아 세우는 행인에게 위해를 가하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마침내 꼭대기에 올라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 왔다. 사막에 새겨진 피, 땀, 눈물을 생각하니 만화에 삽입된 한 컷 한 컷이 유독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다가왔다.
몽골에선 '말'이 귀하다···
겪어보고서야 이해하게 된 것이 또 하나 있다. 만화에 왜 이렇게 ‘말’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지 알게 되었다. 여기서 말이란 인간 생리현상의 결과물인 대변을 의미하는데, 체감상 작품의 5분의 1은 이 말 이야기였던 것 같다. 뭔 만화가 이렇게 대변에 관해 진지한가, 처음 읽을 때 의아하고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소재가 없나 싶기도 하고. 그러나 막상 내가 몽골 여행을 해보니, 말은 정말로 중요한 사안이었다.
채소와 과일이 귀하고 매 끼니 고기 위주 식단이어서인지, 나를 포함한 동행인 모두가 말 보는 일에 심각한 차질을 겪었다. 특별히 불편한 것은 없었지만 오랫동안 말이 조금도 나타날 기미가 없자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몽골의 특산품이라 할 수 있는 유제품을 관광 겸 건강을 위해 매일 챙겨 먹었으나 효력이 없었다. 몽골에선 ‘히이잉’ 하고 우는 말이 길 가다 차로 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국의 비둘기만큼 자주 보이는데, 뱃속에서 ‘구르륵’ 하고 우는 말은 어르고 달래고 빌고 매달려야 겨우 올까 말까 싶을 정도로 보기 힘든 존재였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우리에게도 말 보는 일은 중요한 화젯거리가 되었다. 매일 대화 소재로 오르고, 말 보고 오는 친구들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만화는 소재가 없어서 말 얘기를 한 게 아니라, 중요한 소재이기에 말 얘기를 한 것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바로 다음 날 언제 그랬냐는 듯 내달리는 말을 목격했을 땐 되찾은 건강과 몽골의 신비에 눈물이 조금 날 것 같았다. 소소하지만 중대한 경험이 고스란히 만화에도 녹아져 있었다는 생각을 하자 웃음이 났고, 결국 나 역시 이렇게 공공장소에서 말 얘기를 잔뜩 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구나…. 더러운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여러분도 가보시면 알 거다. 겪어봐야만 아는 것이 있다. 경험 밖의 일을 속단하지 않고 겸허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몽골이 내게 준 너무도 소중한 교훈이었다.
만화와 여행이 데려다주는 곳
듣기만 해도 가고 싶어지는 여행지가 있는 반면, 가보지 않으면 영영 그 가치를 모르는 곳이 있다는 것도 몽골 여행을 통해 배우게 됐다. 매일매일 거대하게 바뀌는 풍경들을 보며 만화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것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담아내려 한 것들을 이제야 너그러운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었다.
재밌던 우연 한 가지는, 여행에 동행하며 알게 된 G가 몽골 여행을 결심한 이유가 웹툰 <한 살이라도 어릴 때>라는 사실이었다. 한 편의 만화가 누군가의 여행을 단념하게도 결심하게도 했는데 결국 한 곳에 모이다니. G는 그 만화 덕에 몽골에 오게 됐고, 나는 만화 덕에 몽골을 더욱 각별히 읽을 수 있었다. 한 편의 이야기와 여행은 결코 작지 않은 영향력을 가지고, 그 영향이 어디로 어떻게 뻗어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나는 ‘결코’ 같은 말을 함부로 쓰지 말아야겠다. 이런 고되고 요란한 여행이 앞으로의 인생에 없을 거라고 단정 짓지도 말아야겠다. 그런 속단을 할 시간에 운동이나 좀 해야겠다. 다음번에 고비 사막이나, 다른 어떤 험준한 땅을 만나더라도 좀 더 수월하게 오를 수 있도록. 여기가, 여행과 만화가 이끌어준 기분 좋은 도착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