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리뷰 <돼지우리>
『돼지우리』, 김칸비, 천범식
기억을 잃은 남자 송진혁이 무인도에서 깨어나면서부터 웹툰 ’돼지우리‘는 시작된다. 진혁은 자신이 왜 이 외딴섬에 오게 됐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낯선 외계행성에 혼자 뚝 떨어진 듯한 막막함에 섬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펜션을 발견하고 머무르게 되는데, 펜션에 사는 가족들이 뭔가, 좀 이상하다.
겉보기엔 평범한 가족처럼 보이지만, 하나같이 기묘한 것이, 그들은 진혁이 와 있는 이 섬이 어디인지, 위치조차 알려주지 않는다.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을 어떻게든 찾으려는 진혁의 노력에도 그저 무관심할 뿐이다. 더구나 이 섬에서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만 같은 위협을, 진혁은 펜션의 가족들에게서 불길하게 감지해 버린다. 웹툰 <돼지우리>의 도입부는 이렇듯 고립된 섬이라는 환경 속에서 미스터리 한 비밀을 극도의 긴장감으로 풀어나간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송진혁의 내면에 있는 트라우마가 반영된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놀라운 반전으로 드러난다. 고립된 섬에서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상황과 이상한 인물들이 자아내는 불안과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은 사실 연쇄살인범 송진혁이 무의식에 억압해 놓은 트라우마가 투사한 세상이었던 것이다.
트라우마는 현재에 감당하기 힘든 과거의 경험들로, 무의식 속에 억압해 둔 기억을 말한다. 의식적으로 떠오르지 않도록 무의식에 쌓아둔 것인데, 이러한 기억들이 과거와 유사하거나 겹치는 자극적인 상황을 만났을 때 불시에 갑자기 떠오르거나 소리와 이미지 같은 단편적인 감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웹툰 <돼지우리>는 이러한 트라우마 기억의 심리적인 발현을 섬 곳곳에 배치해 둔 알 수 없는 사진과 비어 있는 책 같은 미스터리 한 복선들로 잘 표현해 냈다.
그리고 송진혁이 자신이 여러 사람을 죽인 끔찍한 연쇄살인마라는 기억을 되찾으면서 어린 시절 과거의 기억들도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사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폭행과 학대를 당했었다. 이 트라우마로 인해 진혁은 망상증 증세를 보이고, 급기야 돼지를 키우는 농가로 버려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곳에서 진혁은 자신과 나이가 동갑인 지누를 만나게 되는데, 지누는 돼지 농가 가족의 막내아들이었다. 처음엔 진혁과 지누가 친구처럼 잘 지내는 것 같았지만, 진혁의 망상증은 모든 것을 파국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지누가 자신을 무시하고, 지누의 가족이 지누보다 자신을 더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다. 결국 진혁의 망상은 점점 심해졌고, 그 망상이 가져다준 피해의식과 분노의 감정이 분출하여 지누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어느 날 감정이 폭발한 진혁이 돼지우리에서 지누를 밀쳤는데, 하필이면 튀어나온 뾰족한 나사에 뒷목이 박혀 버린 것이다.
웹툰 <돼지우리>는 마치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를 보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인형 마트료시카를 열면, 그 속에 작은 인형들이 계속 겹겹이 들어 있지 않은가. 진혁의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무의식에 저장된 진짜 기억을 계속 열어보는 그런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진혁의 기억에 지누는 돼지 가면을 쓰고 다녔는데, 실제 진짜 돼지 가면을 썼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실 진혁이 지누 얼굴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진혁의 무의식 깊이 눌러놓은 기억이 복원되면서, 지누의 진짜 얼굴이 나오지만. 즉, 진혁의 무의식 속에서 지누가 돼지 가면을 쓰고 다닌 것으로, 기억을 변환시켰던 것이다.
이렇듯 웹툰 <돼지우리>는 매화 뿌려놓은 복선을 회수하며 통쾌한 반전을 보여준다는 점이 장점이면서도,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트라우마 기억의 억압‘이라는 설정과 캐릭터는 그다지 신선한 매력을 전해주지는 못한 것 같다. 전작에서와 같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으로 스릴러 장르의 즐거움을 독자들에게 선사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무엇보다도 웹툰 <돼지우리>는 제목부터가 유의미한 은유와 상징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보통은 ‘돼지우리’가 공간이 정리되지 않아 매우 카오스적인 혼돈 상태일 때 사용되곤 하는 혐오적인 관용 표현인데, 웹툰 <돼지우리>에서 ‘돼지우리’는 ‘돼지’로 상징되는 죄와 그 죄의 기억을 직면하지 못한 채 ‘우리’라는 닫힌 공간인 무의식에 억압해 버린, 트라우마의 혼돈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주인공 송진혁은 기억을 되찾아가면서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던 죄책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런 연유로, 웹툰 돼지우리는 권선징악의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복수극이 아니다. 가해자인 송진혁이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다가 기억을 되찾게 되면서 만나는 심리의 변화는 ‘죄와 용서’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또,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에게 그에 합당한 처벌이 행해지는 공의가 충분하지 않을뿐더러 쉽게 잘 잊어버리는 우리 사회에, ‘죄와 망각’에 대해서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전해준다. 결국 이 돼지우리와 같은 모든 상황을 정리해 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 선택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송진혁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인격 중 하나를 선택하는 마지막 열린 결말은, 그래서 로고테라피를 창시한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의 말을 자연스럽게 떠올려 준다.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어도 단 하나는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도 어떻게 반응할지를 선택할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