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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의 우정

웹툰 〈여자친구〉는 여성 간의 우정, 소유욕, 그리고 교양 없는 친밀함을 통해 사랑과 관계의 경계를 흔드는 작품으로, 인물들의 감정이 충돌하고 왜곡되며 서로를 의식하고 의존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린다.

2025-11-17 이용건

[여자친구]의 우정

『여자친구』, 청건


본 리뷰는 <여자친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 "네 진심을 솔직하게!"

청건고의 아이돌, 인터넷 얼짱(<여자친구>2016년 작이다), 아무튼 초절정 미남인 백빛나는 155cm의 작은 키, 예쁜 이마, 상냥한 인상 아무튼 초절정 미소녀인 최한나를 좋아한다. 백빛나는 최한나의 얼굴을 보기 위해 그녀가 활동하는 영화 동아리에서 제작하는 영화에 출연까지 한다. 촬영이 모두 마무리된 직후 백빛나는 최한나가 중학교 때 임신했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곁에 있어줘야 겠다고 생각한다. 백빛나는 최한나에게 달려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나 널 좋아해!” “그냥 네가 나한테 하고 싶은 말, 그걸 해줬으면 좋겠어! 네 진심을 솔직하게!”

백빛나의 감동적인 고백을 들은 최한나의 대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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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나의 대답
출처: [여자친구]

1. 연대, 우정, 의리...?

이 사태의 원흉은 우정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과 맞붙으면 예외 없이 자신을 희생해야 했던 우정 말이다. 남자친구는 됐어 나는 여자친구가 필요하단 말이야.”라는 한나의 외침에서 알 수 있듯. <여자친구>는 남자친구가 아니라, 여자친구 이야기이다. 한나는 남성이 표백된 여자들과의, 여자들만의 관계를 꿈꾼다. 백빛나를 비롯한 각종 남자들은 이 여자들과의 관계에 방해물에 불과하다. 남자들이 음침하든 쾌활하든 밝든 어둡든 상관없다. 이들은 방해물이다. 이런 맥락에서 <여자친구>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따라서 여성들 사이에서는 결코 허용되지 않던 우정(‘여적여라는 단어가 통용되던 10년 전이 <여자친구>가 창작된 시대라는 사실을 상기해보자.)을 성공적으로 복권해낸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해석은 고추사진을 보내고, 화장실에 버린 생리대를 책상속에 넣어놓는 파렴치하고 음침한 남성들을 말끔하게 삭제해버리고, 한나가 여자-우정-연대 속에서 살아가길 바라는 독자의 마음에 주목한다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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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자친구]

다만 동시에 이러한 해석은 한나가 여자친구들을 바라는 마음을 지나치게 안전한 마음으로 표백하는 일일수도 있다. 그러니까 문제는 한나가 또라이라는 사실이다. 남자친구는 됐고 여자친구가 필요하다는 한나의 외침이 연애는 됐고 우정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여자친구그 자체였다면?

2. "말해봤자 믿지도 않는다고"

이쯤에서 우리는 허영이의 첫 키스 질문에 대한 한나의 대답을 떠올려볼 수 있다. 엄마랑..” 물론 한나는 감기를 다른 사람에게 옮겨야 빨리 낫는다는 믿음 때문에 엄마와 키스했다고 설명하지만, <여자친구>에서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엄마와 최한나의 묘한 분위기는 이 설명으로 일단락되기 어려워 보인다. 이혜지와 김소영만큼이나 성적-친밀한 긴장감이 형성되어 있는 최한나와 엄마의 묘한 관계는 작품에서 묘하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제시된다. 엄마가 딸에게 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모성애를 초과하는 감정들이 작품 내에서 끊임없이 출렁임에도 우리는 우지은처럼 여전히 그런 건 키스로 카운트 안 해도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키스를 했는데..? 그러니까 우리는 최한나와 엄마의 관계를, 학교의 레즈비언 커플이 허영이에게,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독자에게 말한 것처럼, “아주 눈앞에서 키스를 해줘도 아무 생각이 없고, “해봐야 믿지도 않는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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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 보이는 한나..
출처: [여자친구]

한나의 마음은 소유욕으로 점철되어 있다. 남자들이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 모두에게 해가 되고, 심지어 자신과 친구들의 관계에도 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설명은 이른바 백빛나 사태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백빛나는 누구에게도 해가 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나는 친구들이 백빛나를 좋아하는 것도, 녹색뿔테남을 만나러 가는 것도 진심으로 싫어한다. 물론 이 마음들을 우정 아래에 포섭할 수도 있지만, 이때 포섭되는 우정의 의미는 호의적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상대한테 품는 마음일 수는 없다. 한나가 바라는 우정은 자신이 친구들을 완전히 삼키거나, 위장에 누구도 더 이상 들어올 수 없도록 완전히 삼켜지고자 하는 마음이다. 물론 구토를 유발하는 남자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이런 이상하고 내밀한 마음들을 우정으로 뭉갤 수는 없는 일이다.

3. 교양 없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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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적으로 못생긴 녹색 뿔테남
출처: [여자친구]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내가 처음으로 만화에 대해 썼던 글이 <여자친구>에 관한 글이다. 당시 블로그에 업로드 했었던 감상평이 아주 미약하게나마 바이럴을 탄 결과, 방문자 수가 너무 높아져 당황했던 기억까지 생생하다. 물론 얼마 전에 비공개 처리를 했다. 여담이지만 비공개 처리를 하면서 다시 읽어봤는데 녹색뿔테남이 글을 쓴다면 이렇게 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녹색뿔테남을 자처하면서 마지막 문장만 인용해본다.

“<여자친구>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권장받고 암묵적으로 전제되는 이성애 관계를 폐지하는 동시에 여자애들의 우정을 밝혀내라고 반복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그러니까 앞에서 지적했던 한나가 여자친구들을 바라는 마음을 지나치게 안전한 마음으로 표백하는 일은 기실 20살의 내가 했던 일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저 문장이 어느 정도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2025년에 내가 <여자친구>에서 주목한 지점은 이혜지와 김소영이 맺는 문란하고 친밀한(promiscuous intimacies) 관계, 그리고 최한나의 소유욕이었다. 이 이상한 관계들과 마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상대방이 누구를 만나든 적당히 지지하거나 무관심하게 반응하면서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교양 있는 태도가 아니라, 질투하고 간섭하고 종국에는 주먹 다짐까지 하게 만드는 교양 없는 마음들이 서로를 더 친밀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그런 마음들이 낸 상처들을 통해서만 우리는 진짜 피를 나눈 사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20살의 나는 몰랐었지만, <여자친구>2016년부터 그 상처들을 남김없이 핥아 먹고 있었던 것이다.

필진이미지

이용건

2023 만화평론 대상
2022 만화평론 최우수상
<한국 만화 캐릭터 열전> 필자
이상한 마음들에 관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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