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잃지 않기 위한 『나와 승자』 사이의 거리
『나와 승자』, 김아영
김아영(whitegrub)의 『나와 승자』(2018-2021)는 언젠가 다가올 엄마와의 이별을 대비하며, 건강하게 독립하기 위한 기록을 한다. 1인 출판사 '행복한 재수가 있는'을 통해 총 3화가 독립 출판된 이 만화 에세이는 “밀착된 가족에서 살았지만 건강하게 독립하고 싶은 굼벵이”라는 작가 소개로 그 문제의식을 응축한다.
2020년 팬데믹 이후, 우리는 관계에서의 ‘거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더욱 선명하게 체감하게 되었다. 『나와 승자』는 가장 밀착된 관계인 가족 안에서 건강한 거리를 다시 배우는 과정을 기록함으로써, ‘독립’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1. 시간의 역행과 순환
『나와 승자』의 독특한 시간 구조는 관계의 거리를 조율하는 과정을 서사적으로 구현한다. 1화 '두려움'은 미래, 2화 '얼음 땡'은 현재, 3화 '생각 정리'는 과거를 다룬다.
1화는 "엄마가 없으면 나는 살 수 있을까?"라는 상실의 공포를 미래의 상상으로 옮겨 바라본다. 이 미래에서 엄마 ‘승자’는 91세, ‘아영’은 60세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각 75세와 37세부터 감정을 말하기 시작했다고 회상한다.
먹고 싶은 것을 ‘잘’ 말하지 않던 엄마가 자장면을 먼저 제안하는 장면은, 완전히 솔직하지 않아도 서로를 향해 표현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보온병과 커피믹스로 어디서든 열리는 ‘승자 카페’ 역시 그런 관계의 방식을 상징한다. 엄마와 헤어지는 아영의 모습은 창문처럼 4분할로 나뉘며 현실로 전환된다. 이 미래는 아영이 상상해 본 하나의 창(frame)이 된다.


[그림 1] 김아영, 『나와 승자 1』, 행복한 재수가 있는, 2018, p.25-28.
좌: 별책부록 판매 페이지 공개 이미지 / 우: 비평 목적을 위한 단일 페이지 촬영본 (본인 촬영)
2화에서 37살의 아영은 심리 상담을 받으며, 관계 속에서 자신이 늘 ‘도움이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어왔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엄마를 보고 배운 것이었다. 아영은 그 지점에서 비로소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얼어있던 몸이 ‘땡’ 풀리는 순간, 아영은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 대신 솔직하게 표현하는 순간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림 2] 김아영, 『나와 승자 2』, 행복한 재수가 있는, 2020. P.3-6
이미지 출처: 별책부록 판매 페이지 공개 이미지
3화에서 아영은 카페에서 엄마를 인터뷰한다.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엄마 역시 자신을 지키지 못한 채 가족을 위해 버텨야 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인터뷰의 마지막에 아영은 묻는다. “승자로서 산 시절이 언제인 것 같아?”

[그림 3] 김아영, 『나와 승자 3』, 행복한 재수가 있는, 2021. P.23
이미지 출처: 별책부록 판매 페이지 공개 이미지
엄마는 엄마로서의 답을 할 뿐이다. 같은 ‘카페’라도 1화와 3화의 온도는 다르다. ‘승자’가 빠진 카페. 한쪽은 함께 만들어내는 행복의 자리였다면, 다른 한쪽은 말해지지 않은 자리가 남아 있는 공간이다. 그 빈자리에서 아영은 미래를 상상하게 된다.
실제 시간은 3화→2화→1화 순이지만, 작품은 1화→2화→3화로 배열된다. 알 수 없는 미래는 이해하기 어려운 과거와 닮았다. 과거를 만드는 것도 미래를 만드는 것도 바로 현재이기에, 솔직해지기 위해서는 현재를 살아야 한다. 관계의 거리는 한 번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에서 계속 조율된다. 그 반복 속에서 아영은 자신이 바라는 미래를 조금씩 만들어 나간다.
2. 형식으로서의 거리
『나와 승자』의 형식은 작품이 말하는 ‘관계의 거리’를 물질적 차원에서도 선보인다. 첫째, 독특한 접지방식으로 제작된 책은 작품 주제를 시각화한다. 작가가 직접 A1 크기 내지를 자르고 접어서 A6 크기의 책으로 만든다. 작가는 “가족 이야기이기에 종이를 완전히 잘라내거나 풀로 붙이고 싶지 않았다”라고 말한다.1) 종이를 이어둔 상태는 각자가 독립하되 여전히 연결된 관계를 상징한다. 책의 포장 과정에 엄마 승자 씨가 함께한다는 것도 이러한 관계를 보여준다.2)

[그림 4] 『나와 승자』의 접지 구조.
김아영, 『나와 승자』, 행복한 재수가 있는, 2018–2021.
이미지 출처: 본인 촬영 (비평 목적)
둘째, 무채색은 ‘투명’한 태도를 나타낸다. 작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 채색을 덜어내는 선택을 했다.3) 작가의 의도대로, 매끈하고 얇은 연필 선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이 책은 인쇄물이지만, 원본을 손에 들고 있는 듯한 촉각적 경험을 만든다. 손바닥만 한 작은 책이 주는 물질성, 오돌토돌한 종이 질감이 실제 켄트지 위에 그린 작품을 선물 받은 기분을 선사한다.
셋째, 칸의 부재는 ‘경계 없는 독립’을 제안한다. 이 작품에는 명확한 칸이 없다. 글과 그림은 일기장처럼 자유롭게 놓인다. 칸이 없다는 것은 프레임을 만들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다. 그러나 이는 무질서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긴 문장과 짧은 문장의 리듬, 인터뷰 지문 같은 문체, 말풍선과 시선의 흐름, 그림의 확대와 축소 등. 의도된 배치를 통해 글과 그림은 각자의 역할을 하며, 칸이 없는 자유 속에서 만화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해 간다. 스스로 만든 질서 속에서 각 장면은 자유로운 동시에, 서로를 단단히 지탱한다.

[그림 5] 『나와 승자』의 부록
김아영, 『나와 승자』, 행복한 재수가 있는, 2018–2021.
이미지 출처: 본인 촬영 (비평 목적)
이 책은 독립 출판이기에 가능한 아트북의 형식을 취한다. 매 권에 담긴 부록(책과 집의 미니어처, 플립북)은 독자가 만지고 접고 펼치는 행위를 함께 하게 한다. 이로써 독자는 작품의 서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게' 한다. 바로 이 경험이 『나와 승자』가 독립만화로서 지니는 가치이다.
3. 언젠가의 독립을 위해
마지막 3화가 나온 지 4년이 지났지만, 이 책은 여전히 현재를 살고 있다. 매일 들려오는 부고 소식은 죽음이 늘 곁에 있는 사회를 살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때면, 늘 그 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와 승자』는 바로 그 마음으로 기록된 책이다. 아영은 엄마를 기록함으로써 상실을 대비한다. 그러나 이 기록은 기억보다는 현재를 위한 행위다. 기록은 이미 지나간 것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독립을 준비하는 방식이다.
작가는 '나와 OO'라는 제목으로, 가족 모두의 책을 내고 싶다고 말한다. 제목대로, 작가에게 관계란, 곧 ‘마주 봄’이다. 작품의 제목이 나와 ‘엄마'가 아니라 나와 ‘승자’인 것처럼, 세상의 모든 승자 씨는 그 자체로 승자(winner)다. 그것이 곧 1화가 미래를 상상하며 보여준 꿈이다.
그리고 이 태도는 책의 제작 과정까지 이어진다. 작가가 직접 종이를 자르고 접고, 포장하여, 독립서점과 북페어에서 독자를 만나는 모든 행위는 곧 작품이 말하는 관계의 실천이다. 언젠가의 독립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하나의 길을 보여준다. 가족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잃지 않기 위한 거리를 배우는 것. 그것이 곧 건강한 독립이다.
『나와 승자』는 독립서점 '별책부록'과 '호미사진관'에서 온라인으로 구매할 수 있으며, 작가의 SNS(@whitegrub)를 통해 북페어 참여 소식과 새로운 소식을 확인할 수 있다. 김아영 작가는 만화 작업과 더불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있다. 동명의 단편 애니메이션 <나와 승자>(2020)는 현재 '퍼플레이'에서 감상 가능하다.
1) 서점 ‘별책부록’ 『나와 승자』 상세페이지, https://byeolcheck.kr/product/6ac2a701-758e-42c8-a249-86d50401ebf2
2) 김아영 (@whitegrub)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reel/CxVfVOxvGX8/
3) JIFF, “JIFF22_이별이라는 자연재해에 대처하기 위한 사랑의 댐 쌓기_<나와 승자> 김아영 감독 인터뷰”, 2020.08.10. http://jiff.kr/webdaily/?vid=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