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아픔의 만화(萬化/滿花)
『백색 소동』, 미이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씩 절벽은 있다
언젠가는 기어이 올라가야 할
언젠가는 기어이 내려와야 할
외로운 절벽이 하나씩 있다1
(정호승, 「절벽에 대한 몇 가지 충고」 부분)
어쩌면 우리네 삶은 잿빛 아닐까? 검은 환난과 하얀 서광(瑞光)이 섞여 있으니 말이다. 권태롭게 느껴질 법한 인생이 무료하지만은 않은 까닭은 양자의 갑작스러운 도래와 끊임없는 반복에 있을 것이다. 괴로운 암흑과 안온한 광채의 이 융합을 인간 삶의 한 보편성으로 인정할 수 있다면, 그 회색 덩어리가 상반되게 갈라지는 양상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듯하다. 다시 말하면, 유사한 아픔과 불행을 겪더라도 천 길 땅 밑의 명계를 검은 물로 계속 흐르는 이가 있는 반면에 천국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아다니는 일에 성공하는 이도 있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는 뜻이다. 우울의 늪에 빠졌을 때 가라앉을 것인가 떠오를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미이 작가의 만화책 『백색 소동』(너른산(지성사), 2025)2은 이 난제를 진중하게 겪어내고 있어서 주목받기에 값한다. 이 만화는 많은 시련과 재앙 때문에 “우울증”(100쪽)을 앓았었고 그 어려움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작가의 체험을 투명하게 고백한다.3 정신질환에 관한 사회적 인식이 긍정적 방향으로 개선된 점은 있으나 여전히 부정적 거리감이 어느 정도 강하다는 점도 쉽게 부인하지 못하는바, 이 만화의 주제적 특수성 자체가 한계로 지적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언뜻 암담한 고통만 토로하는 단조로운 “생지옥”(50쪽)으로 느껴질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만화가 그런 무거움을 지닌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무게감을 천편일률적으로 되풀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백색 소동』은 한 인간의 마음속에서 미세하게 변화하는 암울한 감정들의 작용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그 만화(萬化)를 다채롭게 시각화한 만화(漫畵)에 가깝다.
스무 살의 작가에게 “연속적으로 좋지 않은 일”(43쪽)이 터진다. 가족의 죽음, 악성 헛소문의 확산, 성범죄 피해 등의 설상가상은 우울증에 안 걸리면 이상할 정도로 작가를 피폐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을 법하다. 그런 불행들로 우울증을 앓게 된 작가는 “스스로를 고립시키기 시작”(58쪽)하고 자해를 한다. 결국, “모든 불행이 ‘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생각”(73쪽)마저 싹트고 만다.
이렇게 “까맣게 물든 나”(45쪽)의 음울한 감정은 주로 흑색으로 묘사된다. 그 검은 고통을 연출하는 방식들이 의외로 꽤 다양하다는 점은 특기될 만하다. 바로 그 점이 이 만화가 평면적 기록으로 함몰될 위험을 상당히 효과적으로 해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연출 요령들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가족의 돌연한 부고를 듣게 된 작가는 자신의 강렬한 심적 충격을 컷에 그대로 주입한다. 가족과의 사별에 처한 작가의 뒷모습이 담긴 컷은 와장창 깨진 유리창처럼 그려진 데다가, 평각으로 반듯이 배열된 직전 칸들과 달리 살짝 기울어 있다. 이러한 시각성은 작가가 느꼈을 충격의 강도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자해의 실행을 다룬 부분은 묵중하다. 자해 행동이 표출하는 잔인함으로 붉지 않고, 그것에 내재한 처연함으로 끝내 아려오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실행 현장을 직접 그리지 않고, 자해 후에 흐르는 핏방울만 회색으로 그려 보여준다. 드러내지 않고도 드러내는 이 연출은 작품의 흐름이 지나치게 잔혹해지는 것을 차단한다. 그와 동시에 독자가 잔잔하고도 밀도 높게 압축된 작가의 아픔에 동화되는 효과 또한 발생한다.
작가는 인간들로부터 입은 상처 때문에 인간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한다. 완벽히 혼자가 된 작가가 외로움을 공간화하는 방법도 눈여겨볼 만하다. 빈방 안에 누운 작가의 모습은 비교적 작게 그려지고 그 방의 공간화로서의 해당 칸이 상대적으로 크게 설정되는데, 이 대조는 공허한 고독감을 형성하는 데에 기여한다.
외톨이가 되어버린 인간의 절망은 어디로 향하는가? 작가는 그런 부정적 감정들이 스멀스멀 꿈틀거리다가 기어이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분노와 원망으로 변이해 버리고 마는 양상을 묘파하게 포착한다. 하지만 작가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음은 자명하지 않은가. 이 점을 자신도 아스라하게 알고 있었을 작가의 내면에서 “극단적인 두 생각이 계속 충돌”(153쪽)하는 갈등이 휘몰아쳤던 것도 자연스럽다. 이 갈등은 자책감을 무효로 하려는 자아와 자책감을 영속화하려는 자아의 대조로 적실히 형상화된다. “정말 모두 내 탓이야?”(66쪽)라고 항변하는 전자의 얼굴은 우측을, “응, 다 네 잘못이야.”(67쪽)라고 악담하는 후자의 얼굴은 좌측을 보고 있는데, 작가의 혼란한 마음속이 이 극명한 대비를 통해 더없이 정확히 시각화됐다.
“모든 불행이 ‘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생각”(73쪽)은 모든 행복을 ‘나’로부터 도출할 수 있다는 희망적 언명으로도 재해석될 수 있으리라. 작가도 적극적인 친구들과 정신건강의학 시스템의 큰 도움이 물론 있었음을 밝히나, 그 모든 도움에도 결국 ‘나’만이 ‘나’를 추스르고 다시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 경험이 그저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202쪽)한 작가가 그 슬픔을 “겸허히 양분으로 삼아서”(204쪽) 이룬 결실은 무엇일까?
만화 말미를 장식한 컬러풀한 만화(滿花)는 그래서 찬란하다. 흑백색 위주의 이 만화에서 가장 알록달록한 순간을 보여주는 총천연색 꽃들이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작가가 “저마다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와 같을 누군가”(184쪽)에게 손쉬운 위안이나 희망을 섣불리 전달하지 않은 점에 있다. 이 만화에서는 아픔을 통째로 앓아 가는 전 과정을 진솔하고 담담하게 고백하는 그 아픔 자체가 일종의 치유로 작용하고 있다. 유폐됐던 아픔이 공개되어 모두의 공감을 얻는 순간, 그 아픔은 아픔이 아닐 수 있는 자유를 얻을지도 모른다.
이 만화의 치유력이 고백의 용기로부터만 솟아나는 것은 아니다. 우울감의 희석에 동원되는 논리적 근거들도 튼튼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느리지만 착실한 약”(219쪽)이라는 조언과 “‘우울증’이라는 얼룩진 조각”(200쪽) 하나가 그(녀)의 모든 조각을 대표하거나 침범할 수는 없다는 통찰이 만화의 감정적 공감력에 지성적 논리력을 더한다.
이렇게 『백색 소동』은 죽음의 음산한 어둠 속에서 “나를 보살피는 방법”(202쪽)을 체득하여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이 만화는 무지갯빛 생명력을 듬뿍 머금고 있다. 폴 엘뤼아르는 자신의 시 「가브리엘 페리」에 우리를 살게 만드는 여러 말들이 있다고 썼다. 그 목록에 미이 작가의 『백색 소동』을 넣어도 좋을 것 같다.
1) 정호승, 「절벽에 대한 몇 가지 충고」,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창비, 2021, 41쪽.
2) 이 글에서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된 것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된 것이다.
3) 예술 작품으로서의 만화가 그 창작자의 생애와 인격으로부터 일정 수준 독립된 자율적 체계인 것은 맞으나, 만화 『백색 소동』의 여성 주인공이 작가의 실제 체험·감정·사유를 거의 그대로 반영하는 인물로 보이는 특성을 고려하여 이 글에서는 만화 속 여주인공을 그 만화의 작가와 동일하게 보는 관점을 취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