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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평온한 죽음, <늪에 잠든 것>

웹툰 〈늪에 잠든 것〉은 죽은 이를 다시 불러내는 초령신당을 중심으로, 죽음과 삶, 이별과 사랑의 경계를 탐구한다. 죽음을 거슬러 사랑을 붙잡으려는 인간의 욕망과 그로 인한 고통을 통해, 진정한 이별이란 결국 ‘평온한 보내줌’임을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다.

2025-10-20 한유희

아름답고 평온한 죽은, <늪에 잠든 것>

『늪에 잠든 것』, 이제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은 어떤 모습일까. 과연 담담하게 죽음을 수용할 수 있을까. 죽음 이후를 우리는 언제나 궁금해한다. 답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후세계가 무엇인지, 누구도 확언할 수 없기에 상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네이버 웹툰 <죽음에 관하여>는 죽은 자들의 사연을 신이 들으며 삶을 돌이켜본다. <늪에 잠든 것>은 죽음과 삶에 대한 욕망을 오컬트 장르를 빌려 이야기한다. 귀신과 무당은 등장하지만, 오히려 사후 세계보다 을 주목한다. 죽은 자를 다시 삶으로 불러내며 또 한 번의 이별을 통해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부르다 죽을 이름

한국문화사의 상장례 중 유교식 상례에 따르면, 초혼은 죽어서 나간 혼이 다시 몸에 돌아와 살아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혼백을 불러 유명에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을 귀신에게 구하는 길이다. 초혼을 해도 살아나지 않으면 비로소 죽은 것으로 인정한다고 한다. 김소월의 시 초혼의 애끓는 정서를 생각해 본다면 죽은 자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다고 이야기한다.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를 끝끝내 하지 못한 것이 사무치는 셈이다. 이는 곧 남은 자의 심정이다. “부르다 죽을 이름이여라고 끝나는 시구에 느낄 수 있는 애절함은 죽음을 통한 이별을 겪지 못했더라도 절절함을 상상할 수 있다.

<늪에 잠든 것>은 남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자를 불러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문제는 죽은 사람을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시키면서 벌어진다. 대부분의 무당은 죽은 자의 넋을 기리며 혼령을 보내주는 역할을 하지만, ‘초령신당은 반대다. 죽은 자를 다시 불러오기 때문이다. 죽은 영혼을 다시 삶으로 불러오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은 대부분 비슷하다. 살아있는 동안 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이루어주고 싶어 한다. 먹이고 싶었던 것을 같이 먹고,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함께하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산 자의 사소하고도 구슬픈 욕망은 자신의 몸을 도구로 여기는 사람과 돈벌이로 여기는 초령신당과 맞물려 돌아간다. 초령신당에서는 죽은 사람을 위한 그릇인 충기를 대여해준다. 그들 또한 사람이지만, 타인의 혼을 받아들이면서 돈을 번다. 죽은 사람을 불러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돈으로 혼을 불러오고자 한다. 하지만 다시 세상에 돌아온 혼이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일주일뿐이다. 그 이후는 없다. 그러나 죽은 자를 불러온 사람들은 영원을 꿈꾼다. 다시 돌아왔으니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삶을 꿈꾸는 것이다. 불가능한 꿈이지만. 초령신당에서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이별을 욕망의 트라이앵글을 통해 지연시킨다. 잔인한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는 셈이다.

안녕을 바라는 사랑

죽음에서 다시 돌아온 자들은 복잡한 상황에 맞이한다. 자신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느꼈던 고통과 슬픔을 온전하게 다시 곱씹게 되며 아이러니에 빠진다. 일그러지고 혹은 모순적이었던 삶의 과정을 돌이켜본다. 다시 한번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문제는 사는 내내 남아 있던 트라우마, 혹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을 긍정적으로 소화하기란 쉽지 않다. 자신이 원한 빙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순리에 어긋난 행위는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사실 사별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견딜 수 없기에 다시불러내는 방법을 선택하고야 만다.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은 모두 다르다. 병에 걸려서, 사고가 나서, 혹은 스스로 선택해서. 각각의 죽음의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죽은 이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윌 스토는 <이야기의 탄생>에서 이야기는 우리의 존재에 의미가 있다는 착각을 일으켜서 삶의 혹독한 진실을 외면하도록 한다고 한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직조되면서 그들은 서로의 삶의 진실을 다르게 기억한다. 따라서 산 사람들은 죽음을 모두 부정적이고 수용할 수 없는 로만 치부하게 된다.

인형의 경우 자신이 삶으로 돌아오기를 꺼렸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기 떄문이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남자친구의 소원으로, 삶으로 돌아온 그녀는 절망을 내비친다. 형이의 유일한 소원은 평온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죽음이 모든 것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죽음이 도피처로 오인될 수 있는 위험성도 내포한다. 하지만 그녀가 겪었던 일들을 통해 그녀를 사랑한 사람과의 온전한 이별을 맞이한다. 그제야 그녀의 죽음은 진정으로 안녕해진 셈이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만남이 늘 부정적이지는 않다. 남은 자와 떠난 자의 교차점은 이별의 최종 장으로 향한다. 사실, 또 한 번의 이별을 준비할 만큼의 사랑을 고민하게도 한다. 한 번의 이별도 힘겨운데, 또다시 맞는 이별, 이제 더 이상의 만남이 없을 이별을 감당하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을 다시금 헤아려보는 것이다. ‘이제 평안하게 보내주세요.’라고 부탁하는 자들의 마음은 어떤 사랑이기에 가능할까. 어떤 사랑의 방식이 유효한가.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의 기술방법을 죽음을 통해 고민하게 한다.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만이 아닌, 결의이자 판단이고 약속이기에.

아른한 존재와 사랑

귀명은 세상 사람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주는 큰 무당이 되겠다고 자신의 포부를 말하지만, 사실은 무당이 되고 싶지 않다. 자신의 쓸모를 위한 대답에 불과하다. <늪에 잠든 것>은 사실 죽은 자들이라기보다 웹툰 속 주인공들의 존재다. 귀명, 희주, 열이는 모두 결핍이 있다. 한 번도 온전한 방식으로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은 스스로 사랑하는 방식을 고민한다. 사랑을 고민하는 것은 결국 존재를 고찰하는 것과 동일한 이야기다. 결국 사람들은 서로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해 서로를 확인하며, 살아갈 이유를 찾아낸다.

삶의 마지막에 선 자들의 이야기는 곧 잘못된 애정이 가득한 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투미한 존재인 아이들이 사랑을 고민하는 것은 결국 세상 속 의 의미를 찾는 것과 동일하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자들의 이야기는 결국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우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필진이미지

한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