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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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된 위험’의 장소, <돈덴>에 대하여

돈덴(만리포, 문학동네) 리뷰

2025-11-24 김윤진

‘합의된 위험’의 장소, <돈덴>에 대하여

『돈덴』, 만리포

만리포라는 필명을 쓰는 작가의 첫 만화책 돈덴은 두 편의 만화를 싣고 있다. <돈덴><13살의 공산주의>가 그것으로, 전자는 자전적 이야기이고 후자는 픽션이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두 편의 만화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것은 다름 아닌 왕성한, 동시에 어딘가 뒤틀린 성욕의 표출이다. <돈덴>의 주인공 박인찬은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이다. 만화는 단정하게 유니폼을 차려입고 의자를 집어 드는 그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관리자인 듯 보이는 남자가 돈덴가에시-!’라고 외치면, 같은 옷을 입은 직원들이 일제히 같은 동작으로 움직인다. 만화의 제목이기도 한 돈덴은 연회장에서 테이블과 의자 배치의 교체 작업을 가리키는 은어를 줄인 말이다. 그러니까, 인찬은 지금 연회장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중이다. 곧이어 시니어 매니저가 인찬을 조용히 불러 귀 뒤의 타투를 가리도록 조언하는데, 그런 그의 사무적인 태도에서조차 성적 욕망을 느끼는 그녀다.

만화는 인찬의 의식을 따라가듯 여기에서 저기로 점프하며 진행된다. “자기 샴푸 냄새에 성욕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출근”(25)할 정도로 왕성한 그녀의 성욕은, 급기야 자신을 배려하는 매니저의 모습에 자극되고 만다. “사실 뺨을 쳐주길 바라고 있다./어릴 때부터 쭉/ 깔끔하고 홀쭉한 남자./ 또 맘만 먹으면 누구에게든 야들야들 아부하는 남자의 손바닥으로 약간만 맞길 바라며 살았던 것 같다.”(33) 이윽고 인찬은 일하던 곳에서 계약 종료 통보를 받고, 새로운 회사에 입사한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드러내 버린다. 노숙인을 쫓아내는 일에 동원된 용역을 향해서 내가 빠지는 남자들”(63)이라는 인찬의 발언은,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부적절한 애정”(68)임에 틀림없다. 작가는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나만 느낄 리 없잖아?”(68)라며 되묻는 것이다.

미술과 게임에 관해 글을 쓰는 윤수빈은 어릴 적 <원피스>를 접한 것을 계기로 섹슈얼리티바이올런스(violence)’가 한데 뒤얽힌 취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한다.1건전한 섹슈얼리티불건전한 섹슈얼리티라는 구분이 곧 억압적 구조의 반증이라고 주장하는 그가 합의된 위험의 장소를 긍정하는 지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의 말을 빌려오자면, “위험할 가능성이 없는 곳에서는 스스로 안전을 신경 쓸 기회도 없다.”2 그렇다면 합의된 위험이 있는 곳은 어떤 곳일까? 글의 말미에서 그가 다다르는 장소는 하드코어 펑크 밴드의 공연장(과 프로레슬링 경기장)이다. 하드코어 펑크를 공연하는 밴드와 관객 사이에 이루어지는 신체의 교환과 접촉과도한 락 놀이라고도 언급되는은 그에게 공격적으로 보이기보다는 취약성을 전면에 드러내는 것처럼여겨졌다3. 이어서 그는 그곳은 서로의 취약성을 받아 주고 서로의 안전을 확인하기로 합의된 공간이라는 것이 느껴졌다라고 덧붙인다.

다시 <돈덴>으로 돌아오자. 인찬이 드러내는 성욕의 중심엔 분명 폭력성이 자리한다. 앞서 윤수빈이 폭력과 섹슈얼리티가 한 쌍을 이루는은밀한 취미를 가졌다고 고백한 것처럼, 인찬의 취향도 이와 마찬가지인 듯하다. 위험이 전제된 장소에서 도리어 서로의 취약성을 전면에 드러내는 경험을 했다는 윤수빈의 설명은, 인찬이 자신과 반대편에 있는 저쪽남자들에게 애정과 욕망을 갖는 이유를 짐작케 한다. “약한 것에 끌리는 거야./ 약한 마음에 드나들고 싶어서/ 기대가 돼서/ 어쩔 줄 모르게 되는 거야.”(67) 그러니까 인찬은 폭력을 저지르는, 겉보기엔 누구보다 강해 보이는, 그러나 사실은 힘도 별로 없고 바쁘기만 한”(66) 남자들에게서 가장 취약한면모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 그녀는 폭력이야말로 강한 자가 아니라 약한 자의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종류의 사람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나면, 우리는 그녀의 욕망이 어찌나 이타적이고 지극히 박애적인지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다. 동시에, 그녀가 왜 그리도 역사적 사건을 쉽게 보아 넘기지 못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지(인찬은 마음에 드는 일본인에게 식민지 얘기를 좔좔 늘어놓는 버릇이”(19) 있고, 길거리의 반전 서명 운동에 기꺼이 동참한다. 또한, 오키나와 사람에겐 동질감을 느끼는 한편 베트남 동료에겐 나서서 자국의 잘못을 시인한다), 과자를 깨무는 입을 보면서단번에 미래의 신세까지염려하게 되는지(71)에 대해서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약간만 맞길 바랐다는, 안심하고 싶어서 때려주길 바랐다는 그녀의 부적절한욕망은 상대의 취약성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더욱 정확하게는, 그것을 받아주고 싶은 마음에서비롯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돈덴>은 자전적 이야기지만, 어디까지나 한 편의 만화다. 실제로 작가가 에필로그의 마지막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녀의 이름은 박인찬이 아니며 그녀가 들고 있는 의자는 응접실 의자가 아니다. 컷의 자유로운 배치와 서사의 비선형적인 전개, 선과 색의 과감한 사용에서 관찰되는 작가 특유의 시각성은 만화의 정서를 한층 더 입체적으로 경험하도록 한다. 일관되게 느껴지는 작가 특유의 태도는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1) 윤수빈, 한 편의 비디오, 사람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그래도 삶은 계속되었다), 세마 코랄(Sema Coral)20241220, http://www.semacoral.org/media/pages/cabinet/2024coral-critic-study-soobinyoo/a9d32b8a1b-1734584904/semacoral_cabinet_2024coral-critic-study-soobinyoo.pdf

2) 윤수빈 위의 글, 7.

3) 윤수빈, 위의 글, 7. 여기서 언급한 과도한 락 놀이관중석의 가운데를 비워 놓고, 비워 둔 공간을 이용해 관중 혹은 아티스트가 뛰어다니거나 날아다니거나 몸을 던지거나 할 수 있게”(7) 하는 공연 문화다.

필진이미지

김윤진

시각예술 및 대중문화에 대하여 글을 쓴다.
2024년 대한민국 만화평론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수상하였고 같은 해 GRAVITY EFFECT 미술비평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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