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산화)
“고시마는 포기해, 아라키, 프로 테스트일이 다가와서 며칠 전에 측정을 해봤는데 그 놈은 안 돼…링에 세워선 안 된다구, 그 놈은 인간이 아니야, 운동능력이 너무 뛰어난 복서 중에는 아주 드문 일이지만 링 위에 올라야만 숨을 쉴 수 있게 되는 경우가 있지, 고시마가 그...
2008-08-30
석승환
“고시마는 포기해, 아라키, 프로 테스트일이 다가와서 며칠 전에 측정을 해봤는데 그 놈은 안 돼…링에 세워선 안 된다구, 그 놈은 인간이 아니야, 운동능력이 너무 뛰어난 복서 중에는 아주 드문 일이지만 링 위에 올라야만 숨을 쉴 수 있게 되는 경우가 있지, 고시마가 그 전형적인 예야….밸런스야. 아라키, 중요한 건 밸런스라고, 모든 일에는 한계란 게 있지…다들 정해진 틀 안에서 살아가잖아…그런데 그걸 초월해 버리면….고시마는 잘못 채워진 단추야.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지. 고시마는 지나치게 강해. 그건 비극이지.” “철콘 근크리트”, “GOGO몬스터”, “하나오”, “핑퐁” 등 수없이 많은 문제작들을 발표하며 일본 만화계의 신성으로 떠오른 천재 작가 마츠모토 타이요, 그의 초기작 “ZERO”가 한국어 판으로 출간되었다. 너무나 강해서 대전상대가 없는 무패의 복서 고시마 미야비의 절대고독의 세계를 그려낸 이 초기작은, 마츠모토 특유의 색깔이 잘 드러나면서도 “핑퐁”이나 “하나오”처럼 무언가 세련된 맛은 아직 발휘되지 않는, 마치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싱싱하고 거친 느낌의 작품이다. “이거 봐… 금방 망가지잖아…그러니까 더 튼튼한 장난감을…내게…” “ZERO”의 주인공 고시마 미야비는 세계 미들급 통합 챔피언으로 무려 26차례나 타이틀 방어에 성공한 무시무시한 복서다. 패배는커녕 다운조차 당한 적이 없는 이 엄청난 복서의 별명은 그래서 “ZERO”다. 작품은 1화에서부터, “ZERO”라 불리는 복서의 압도적인 시합을 보여주면서, 차분하고 냉정하게 그의 주치의와 트레이너의 대화를 중간중간 회상처럼 끼워 넣는다. 이러한 교차편집법은 겉으로는 분명히 정상적인 인간이면서도 속으로는 어딘가가 살짝 망가진 이 서른 살 남자의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아주 효과적으로 설명해준다. “고시마는 강하지만 그게 다죠. 국민들은 너무 큰 우상은 따르질 않아요. 전설은 짧을수록 아름다운 법입니다. 물러날 때를 놓치는 건 비극이죠.” 아무도 꺾지 못하고 따라서 아무도 도전하려 하지 않는, 이 불패의 남자에게 사실 세계챔피언 타이틀 같은 것은 의미가 없다. 그의 스폰서이자 프로모터에게도 너무 압도적이어서 흥행조차 안 되는 그는 더 이상 유용한 카드가 아니다. 모두들 그가 이제 그만 무패의 전적으로 은퇴해서 화려한 전설로 남길 바란다. 그러나 정작 그의 관심은 하나밖에 없다. 자신의 절대 고독을 이해해 줄만한 상대, 자신이 진정으로 부딪혀도 부서지지 않는 강한 상대, 그런 강자만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은 자연스럽게 “ZERO”에게 걸 맞는 상대, 멕시코의 젊은 복서 토라비스를 부각시킨다. 분량으로는 단 두 권뿐인 작품이지만, “ZERO”는 등장인물들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매우 철학적인 스토리가 잘 매치된 읽는 맛이 살아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