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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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준지 공포만화 콜렉션 (소용돌이)

물끄러미 쳐다보면 눈이 핑핑 돌아가는 소용돌이. 소용돌이 앞에서 인간의 시선은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제일 먼저 대상을 잃어버리며, 그 다음 눈을 잃어버리며, 마지막으로 내가 누구인지 잃어버리게 된다. 나는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게 된다. 소용돌이는...

2004-06-07 하민석
물끄러미 쳐다보면 눈이 핑핑 돌아가는 소용돌이. 소용돌이 앞에서 인간의 시선은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제일 먼저 대상을 잃어버리며, 그 다음 눈을 잃어버리며, 마지막으로 내가 누구인지 잃어버리게 된다. 나는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게 된다. 소용돌이는 인간을 현기증에 빠지게 만든다. 인간을 어지럽게 만드는 소용돌이, 소용돌이가 일으키는 현기증, 이것은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일까, 단지 귀속 달팽이관의 평형성이 무너졌기 때문일까. 먼저 텍스트 생산은 고도로 의식적인 활동이란 점을 전제해야 한다. 따라서 텍스트에서 사회적인 문제가 사상됐다고 해도, 텍스트를 생산하는 작가의 의식에 드리워진 사회적 흔적마저 지워버릴 수는 없다. 이 흔적의 표면을 들추어내어, 이면의 징후를 포착해야 한다. 즉 텍스트가 의식적인 행위의 산물이란 점, 그것이 알리바이이자 실마리다. 이토 준지의 『소용돌이』도 마찬가지다. 특히 『소용돌이』 같은 텍스트는 흔적을 억압되고 굴절시키므로, 텍스트 내에서 손쉽게 답을 찾으려 해선 안 된다. 그러면 어디서 출발해야할까? 사실 출발점은 앞서 지적했다. 현기증, 소용돌이가 일으키는 심리적 현상, 바로 이것에서 사회적 징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현기증의 기원은 어디서 시작됐을까, 언제부터 인간은 현기증을 끼고 살게 됐을까. 거대 도시의 성립, 거미줄처럼 형성된 복잡한 도시 거리의 형성. 벤야민은 일찍이 거대 도시의 군중에서 현기증의 징후를 엿보았다. 그는 도시 군중이 언제나 복잡한 거리에서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걷는 모습을 관찰했다. 군중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좌우를 살필 수밖에 없다. 자칫 신경의 끈을 놓칠라 치면, 곧장 다른 군중과 충돌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이 점은 시골 할아버지가 도시에 상경한 모습을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할아버지가 길을 잃기란 시간 문제요, 그의 눈앞에 펼쳐진 복잡한 거리는 현기증만 줄 것이다. 여기서 시각이 곧 지식이요, 지식이 근대 인간을 정당화했던 점을 유념해야 한다. 소용돌이는 이 같은 (도시적?사회적) 현기증이 굴절되어 전치된 결과다. 쿠로우즈 마을에 배회하는 소용돌이의 공포와 저주는 결국 현대 거대 도시 문명의 공포와 저주다. 이 공포가 점점 내면화되는 양상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의 바깥을 위협하던 소용돌이는 점차 내면화되기 시작한다. 몸을 휩쓸고 할퀴는 소용돌이가 어느덧 몸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한다. 공기를 점유하더니, 사회적 공간(등대)을 점유하기 시작하고, 몸에 침투해 달팽이로 만들어 버린다. 이제 더 이상 달아날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출구는 막혀 있고, 앉아서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일만 남게 된다. 『소용돌이』가 근대적 판타지란 점은 현대 사회의 공포의 이면을 표현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근대적 판타지는 다른 세계를 창조하지 않고, 이 세계의 언저리에 머물며 비틀어 댄다. 쿠로우즈 마을로 가는 길은 막혀 있지 않았다. 한 마디로, 내가 고개를 돌리면 언제든 또 다른 쿠로우즈 마을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기괴한 정서가 기어 나오게 된다. 그런데 못내 아쉽다. 엄밀한 의미에서 판타지의 결말은 있을 수 없다. 다만 문제와 균열의 봉합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판타지는 자명한 세계를 의심하는 게 기본 테마이기 때문이다. 텍스트 내에서 의심을 멈추고, 의심에 답을 제시한다면, 의심의 효과는 상실된다. 키리에와 슈이치의 결합은 무엇이고, 소용돌이의 안온한 종말은 또 무엇인가. 안일한 끝맺음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소용돌이』의 결말은 매우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