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11월
가족을 소재로 한 작가 김 진의 작품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서 모습이 드러난다. 『레모네이드처럼』과 같은 홈드라마의 정석을 따르면서도 은근슬쩍 가족애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을 보여주는가 하면 『숲의 이름』처럼 끊을 수 없는 업보의 굴레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인간 군...
2004-05-20
김규진
가족을 소재로 한 작가 김 진의 작품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서 모습이 드러난다. 『레모네이드처럼』과 같은 홈드라마의 정석을 따르면서도 은근슬쩍 가족애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을 보여주는가 하면 『숲의 이름』처럼 끊을 수 없는 업보의 굴레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인간 군상을 가족의 해체를 통해서 나타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밀라노…11월』은 이탈리아 밀라노의 마피아들의 전쟁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애와 가족에 대한 의미를 던지고 있다. 로마에서 할머니와 단 둘이서 살고 있는 아메데오는 부모 없는 설움을 견디며 자란다. 밖에서 벌을 받는 동안 우연히 만난 어떤 남자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그가 왔다는 밀라노에 관심을 보이며 지긋지긋한 로마를 벗어나기를 열망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고아원에 갈 처지가 된 아메데오는 자신의 아저씨, 아르트로 패트라르카를 찾아 밀라노로 떠난다. 우연히 만났던 기억을 더듬어 유일한 혈육인 아저씨에게 가족의 따뜻함을 느끼려하는 아메데오에게 아르트로의 태도는 냉담하기만 하다. 아르트로와 아그네스, 샌드로의 숙적인 안젤로 곁에 있는 레지나로부터 밀매거래 계획을 알아낸 아르트로는 미리 선수를 친다. 경찰과 안젤로는 아르트로의 행적에 관심을 기울이며 기회를 엿본다. 한편 아르트로와 떨어져 기숙학교로 가게된 아메데오는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아르트로를 그리워한다. 이미 작가는 가족이라는 구성원을 통해서 인간의 끈끈한 혈연관계를 따뜻하게 혹은 서늘하게 표현해왔다. 『밀라노…11월』은 마피아라는 깊은 혈연관계로 맺어진 가족들이 서로에게 총구를 들이대고 함정에 빠뜨리는 모습을 수시로 보여주고 있다. 아르트로와 아메데오 그리고 안젤로의 인척관계가 미궁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면서 피로 이뤄진 가족이 처절한 원수지간이 될 수 있는 가를 보여준다. 특히 마피아라는 옷을 둘러씀으로써 피를 나눈 형제, 자매가 남보다 더 철저하게 복수의 칼을 갈아낼 수 있음을 알려준다. 또한 혈연관계이기 때문에 용서와 속죄가 불가능하다. 가족을 해치는 자는 아무리 피를 나눈 형제라 해도 복수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그네스는 ‘자신의 가족을 죽이면 상대의 가족 하나를 죽이는 그리스의 관습’을 말하면서 아르트로의 비극과 복수의 과정이 얼마나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 아르트로에게 아메데오가 보내는 따뜻한 눈길과 관심은 자신이 복수를 위해 갈아뒀던 날카로운 칼날을 무디게 할 것임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밀라노…11월』속에서 가족이지만 가족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아르트로와 아메데오를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들은 피를 나눈 형제지간이라도 서로에게 총을 들이대는 원수지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살갑게 대할 수 없고 가족의 따뜻함이라고는 찾을 수 없다. 가족이면서도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눌 수 없는 아메데오와 아르트로의 관계는 그런 복잡하고 모순된 가족관계의 희생양이다. 피를 나눈 형제, 자매이면서도 가족이 될 수 없는 우울한 인물의 갈등관계가 차가운 11월 겨울의 밀라노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이미 『레모네이드처럼』이나 『숲의 이름』처럼 다양한 가족관계를 통해서 인물의 갈등과 화해를 표현함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작가적 특징이 『밀라노…11월』에서도 발휘되고 있다. 철저한 패밀리 체계를 강조하는 마피아에서 『밀라노…11월』은 가족이지만 가족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의 갈등과 고뇌를 표현하면서 반대로 가족애와 따뜻한 인간미를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작가가 자랑하는 서정적인 인물 심리묘사와 치밀한 이야기 구성력을 통해서 독자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가족이라는 스펙트럼을 통해서 또 하나의 우울한 빛을 만든 김진. 가족이면서도 가족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설정함으로써 작가의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발휘되는 『밀라노…11월』은 그런 우울한 빛을 뿜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