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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리뷰
<병의 맛> - 타자를 바라보는 윤리적 재현
2020-10-21
김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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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의 맛> - 타자를 바라보는 윤리적 재현
도시에서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간신히 매달린 곳은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내려가고 올라가길 반복하는 길은 가난한 자의 형벌이었다. 살기위해 억지로 내려갔고 도망칠 곳을 찾아 힘겹게 다시 올랐다. 가파른 비탈길에 내몰린 소년이 마주한 문장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학교 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너나 나나 차여 굴러 떨어지긴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동정하던 찰나, 왜 굳이 그가 목숨을 걸며 학교를 가야만 하는지 질문이 생긴다.
작품이 폭력성을 고발하는 윤리적 재현을 추구하여도 아이러니하게도 미디어는 그 존재로서 윤리적 문제를 품고 있다. 독자는 스크롤을 내리거나 책장을 넘김으로써 폭력에 고통 받는 피해자를 ‘관음’하기에 타자의 재현은 필연적으로 엔터테인먼트로서 소비된다. 더욱 더 고통스럽게 맞고 더욱 더 치욕스럽게 그들을 굴욕 시킨다. 「가짜사나이」의 유행처럼 우리는 고통을 전시하는 것이 하나의 셀링 포인트가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시대에서 <병의 맛>은 안티테제에 속한다. 박태준 작가 위시의 ‘반성하는 일진’ 서사가 여전히 ‘아싸’의 ‘인싸’ 내제화라 할 때, <병의 맛>의 2019 오늘의 우리만화 수상은 시장과 결을 달리하겠다는 비평계의 의지일 것이다. 일진 장르 형태를 유지한 가해자의 반성 서사는 가해자의 방식으로 피해자에게 보상을 강요할 뿐이었다. 작품들은 액션장르라는 외피에 숨어 학폭의 피해자에게 사과와 보상하는 과정을 결국 또 다시 ‘폭력’으로서 해결한다. 독자의 열광은 작품의 도덕적 흠결마저 덮어 버릴 정도로 유행했다.
엠마루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타자(l’autre’)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기 동일시를 거친다면 그것 역시 폭력이라 보았다. 레비나스는 우리(주체)가 타자와 마주할 때 타자성을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느냐 타자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윤리적인 길로 갈 것인가 선택해야한다고 보았다. <인생존망>은 레비나스 입장에서 타자를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병의 맛>의 ‘이순이’가 주인공 변이준을 이해하는 과정은 레비나스가 말한 길과 같다. 종래에 이순이 역시 ‘그것’이 보이는 것으로 암시했지만 이순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의심 없이 이준이 ‘그것’이 보인다는 것을 그대로 이해해줬다. 타자의 고통 앞에서 이순의 선택은 자기중심적인 해석이 아닌 변이준 그 자체로 이준을 받아들인 것이다. <병의 맛>은 모두가 타자의 고통에 외면하는 것과 달리 우리가 어떻게 타자의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에서 작품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다만 앞서 언급한 바, 윤리적 소재를 다루는 작품이 반드시 윤리적이진 않다. 외려 오히려 더 비판받기 좋은 위치에 놓였다. 작품은 결국에 작가의 자의식이기 때문에 무엇을 보여주고 감추는지 선택은 전적으로 작가에게 달렸다. 영화뿐만 아니라 만화역시도 ‘프레이밍 효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만화의 궁극적인 도착점은 독자로 향한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행위를 통해 독자들에게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던진다. 이야기 속에서는 인물과 인물의 관계가 얼개를 만들지만 이야기 밖에서는 인물과 독자는 작가가 그린 칸을 통해 관계를 형성한다. 작가가 타자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순간부터 타자성은 작가의 펜 끝에 종속되어 대상화 될 수밖에 없다. 학교폭력의 고발과 피해자의 아픔을 전달하겠다는 윤리적 의지는 모순적으로 펜 끝에서 왜곡되어 표현된다. 왜곡된 대상이 프레임 속에 갇히게 되면서 또 다시 굴절한다. 타자를 만화를 통해 재현하겠다는 선언은 반윤리적인 수단을 사용하겠다는 필연을 인정하는 바와 같다.
알려졌다시피 하일권 작가는 공황장애를 겪고 있고 그 고통을 <병의 맛>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변이준의 그것은 작가가 겪고 있는 공황장애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하일권 작가 역시 공황장애 속에 수많은 매트릭스 중 하나로 그가 모든 공황장애를 겪는 환자들의 대표가 되진 않을 것이다. 즉 <병의 맛>의 칸 역시 작가의 프레임이기 때문에 설사 공황장애를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하여도 작가의 주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떻게 타자를 윤리적으로 재현해야할까라는 고민은 ‘윤리적’ 작품인 <병의 맛>에서도 주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이는 독자가 타자를 필연적으로 관음하게 되는 구조 속에서 작가는 그 흐름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야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작품도 윤리적인 부분에서 무결할 수 없다. 그러나 윤리적 재현은 끊임없는 시도와 끈기를 바탕으로 하는 방향성 추구에서 존재할 수 있다.
이제 작품으로 돌아와 ‘왜 굳이 그가 목숨을 걸며 학교를 가야만 하는지’ 자문 해본다. 보통 그렇게 아픈 상황이라면 휴학, 자퇴 등의 선택지가 있다. 미성년인 그에겐 부모가 있고 제도가 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학교로 향하도록 내모는 당위성은 모두가 그를 환자이기 전에 학생으로 바라보는 주체의 자기중심적 해석이 반영된 것이다. 심지어 그 부분에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면 이를 읽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그의 부모님이 부재한 것을 발견한다. 비단 부모라면 자식의 아픔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 고통을 덜어주고자 고군분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준의 부모는 프레임 밖에서 대사로만 존재를 나타낸다. 작가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의도적으로 부모님의 무관심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요. 공황장애라는 게 심각해지면 활동 범위가 줄어들게 되거든요. 사람 많은 곳이나 사회생활을 피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우울증이 동반이 된다고 해요. 그러면 집, 심하면 방 밖으로도 못 나가는 히키코모리가 될 수 있거든요. 심각할 땐 그렇게까지 될 수 있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려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특별히 부모님의 무관심을 의도한 건 아니었습니다.”
1)
1)
http://dml.komacon.kr/webzine/interview/27365
작가의 인터뷰에서 ‘극단적으로 표현하려다 그렇게 됐습니다.’라는 부분은 작가의 자의식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무리 공황장애를 알리고자 하여도 앞서 밝힌바, 그 과정은 구조적으로 결단코 객관적일 수 없다. 수많은 장치들이 작가의 의도로 전달하기 위한 인위적 장치라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공황장애라는 타자성을 표현하는 연출은 주인공의 회피가 아닌 주변인의 무관심으로 나타낸다. 변이준과 소통하는 ‘이순이’와 그렇지 않은 주변인이라는 이항대립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이다. ‘힘들면 쉬어도 돼.’라고 말해주는 어른하나 없는 세상을 표현함으로써 독자들이 이준을 동정하도록 만들고 윤리적 선택을 하도록 종용한다. 나아가 이준을 고립시킴으로써 그가 갖는 타자성을 폭력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한다. 칸의 크기를 살펴보면 그 의도를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전작 <안나라수마나라>(2010)는 가로 비를 늘림으로써 주인공과 주변인을 한 프레임에 담는다면 <병의 맛>은 세로 비를 늘려 칸에 인물 하나가 꽉 차도록 배치한다. 타자성은 주체와 비교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데 <안나라수마나라>는 가난이라는 작품 키워드를 주체와 타자를 한 프레임에 담아 끊임없이 드러내지만 <병의 맛>은 오직 타자만이 프레임에 담겨 고독을 표현한다.
이 지점에서 <병의 맛>은 분명 <안나라수마나라>에 비해 훨씬 윤리적이다 평할 수 있다. <안나라수마나라>는 급우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주인공을 대비시키고 가난이라는 타자의 고통을 급우들의 대사를 통해 드러낸다. 주체에 어울리지 못하는 타자의 고통을 전시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시각적으로 표현하지만 목적을 위해 피해자의 타자성을 볼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반면 <병의 맛>은 배제를 통해 주체인 독자와 피해자이자 타자인 변이준의 일 대 일 만남을 성사시킨다. 타인의 생각을 배제함으로써 오롯이 주인공은 타자가 아닌 주체로서 자신의 아픔을 뱉어내고 그의 독백을 읽는 독자는 최대한 타자로서 주인공을 이해하도록 장치했다. <안나라수마나라>에서 주인공의 생각은 프레임 안에 풍선으로 표현되었지만 <병의 맛>에서 주인공의 생각은 프레임 밖에 서술되어 있다. 이는 주인공이 한발 물러서 자기 상황을 객관화 시키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오늘 날 TV예능에서 등장인물이 후에 자기 상황을 리뷰하는 문법과 닮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황에서 비롯된 오독을 방지하고 인물의 진실성이 더 잘 전달되게 한다. 리뷰는 수용자에게 자기 메시지를 명징하게 전달하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병의 맛>은 그런 점에서 타자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것에 높은 평가를 한다.
그러나 서술자로서 이준은 학교에 가기 싫은데 왜 억지로 가야만 하는지 대답하지 않는다. 물론 기억은 연속이 아닌 분절이다. 이준의 서술에 의존하는 이야기 흐름은 끊어지는 것이 맞다. 이준은 기억의 분절 중에서 자신이 유리한 부분만 선택적으로 뽑아 서술할 권리가 있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의 빈틈은 당연하다. 이준은 왜 학교에 가야만 하는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고 혹은 말하기 싫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어디까지나 작가의 의도적 배제(연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병의 맛>의 의도적 배제는 타자성을 전시해 독자들이 관음하게 만드는 기존의 방식을 끊어낸다. 대중문화로서, 시각 미디어로서 짊어지는 비윤리적 죄의식을 타개하는 새로운 해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의도한 선택적 배제를 경험하는 독자들은 타자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없는 채로 ‘윤리적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즉 의도적 배제는 타자의 비윤리적 전시를 피할 수 있지만 해석의 자유를 구속하고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윤리적 선택을 강요함으로써 또 다시 비윤리적일 수 있다. 따라서 순이와 함께 언덕을 오르는 결말을 사색할 여유가 없다. 억지로 학교에 가야만 하는 고통은 당장은 이순을 통해 경감될 수 있지만 여전히 그의 타자성은 제도 안에서 존중되지 않을 것이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비판처럼 레비나스의 타자를 향한 무한정 지향은 신학적 낭만에 불과할 수 있다/ <병의 맛>의 결말 역시 판타지적 낭만만 가득하다. 잘생긴 소년과 순수한 소녀의 아름다운 행복은 현실에서 불가능하기에 동화로 끝이 난다.
<병의 맛>은 타자의 재현하는 과정에서 많은 윤리적 고민을 담고 있다. 사회적으로 오인된 공황장애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그것’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시각적으로 표현하려 했으며 타자가 관음의 대상으로 소비되지 않도록 배려한 프레임도 눈에 띈다. 그러나 보통 작가는 서사의 빈곤을 독자들이 채우게끔 유도하는 것에 반해 <병의 맛>은 선형적이고 강제된 동화에 가깝다. 배제의 방법은 독자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차단시킨 것으로도 다가온다. 클로즈업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인물들을 배제시키고 내레이션으로 치환된 인물의 생각 표현 등이 그 원인일 것이다. 타자의 고통 앞에 독자는 윤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 윤리적인 선택을 강요할 순 없다. 본 작이 좋은 작품임에도 선뜻 즐겁지만 않은 이유다. 물론 타자를 향한 윤리적 실천은 끝없이 나아감에 있는 것엔 동의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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