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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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 쿠키로 키운 내 딸 유미야. <유미의 세포들>

2020-10-16 조아라



잘 가, 쿠키로 키운 내 딸 유미야. <유미의 세포들> 

“유미는 갔습니다.
아아! 쿠키 구워1) 키운 내 딸, 유미는 갔습니다.”

 2015년부터 연재해 온 이동건 작가의 네이버 웹툰 <유미의 세포들>이 드디어 완결이 났다. 그동안 정들었던 수많은 세포들과도 이제 이별이다. 그리고 주인공인 유미와도 안녕이다. 지난 5년 동안 유미에게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직장을 퇴사해 작가로 성공했고, 한 번의 짝사랑과 세 번의 연애를 경험했으며 결국 ‘신순록’과 결혼했다. 유미의 결혼식 장면에서는 딸을 혼인시키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인지 유미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좀 더 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작품이 완결된 이제는 단념해야 한다. 정말이지 아쉽고 헛헛한 마음을 금하기가 힘들다.

 어쩌면 이렇게나 아쉬워하는 모습이 주책맞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봐야 작품 속 허구의 인물일 뿐인데, 딸을 시집보낸 것 같다느니 하며 과몰입 하는 모양이 꼴사나워 보일 수도 있다. 변명을 하자면 이게 다 유미 뇌 속(이하 뇌내(腦內) 랜드)에 있는 세포들 때문이다.
유미는 뇌내 랜드의 세포들에 의해서 말하고 행동한다. 반대로 뇌내 랜드의 날씨는 유미의 기분에 따라서 바뀐다. 유미와 세포들이 활발하게 상호작용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전지적 독자의 시점에서 이러한 상호작용을 속속들이 관찰한다는 것은 유미를 100%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세포들은 유미가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했는지, 그리고 지금 유미의 기분이 어떤지를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묘사해 준다. 따라서 독자에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유미의 행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미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는 독자들은 유미에게 더욱더 몰입하게 된다.

 사실 필자에게 <유미의 세포들>은 초반만 해도 그렇게 호감인 작품은 아니었다. 전직 생명공학자로서 ‘세포’라는 단어를 적절치 않게 쓰는 것도 마뜩찮았는데(적지 않은 과학자들이, 과학적 용어를 비과학적인 곳에 남용하는 것을 불편해 하며, 필자도 그 중 하나이다.) 심지어 뇌에 있는 세포라니. 뇌에 있는 세포라면 응당 ‘뉴런’의 모양을 하고 있어야 할 터인데, 작품 내 세포들은 이름만 세포지 귀여운 캐릭터이다. 파란색 쫄쫄이 유니폼을 입은 세포들은 심지어 이름도 응큼이, 출출이, 세수세포 등으로 일차원적이다.



△ 유미의 세포들에 등장하는 세포들. 분홍색 옷을 입은 사랑세포가 유미의 ‘프라임세포’이다.



 뇌 속의 귀여운 캐릭터 세포라니, 그저 비현실적인 설정 정도로 치부하고 무시했었다. 하지만 스토리가 전개될수록 이 비현실적인 존재인 세포들이 현실을 표현하는 데에 제격이라는 아이러니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세포들의 진가는 ‘구웅’의 여사친2)
인 ‘서새이’의 등장과 함께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서새이는 구웅의 직장동료이자 친구인데, 문제는 서새이가 ‘친구’와 ‘애인’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우기’는 이러한 서새이의 태도를 ‘나하긴 싫은데 남 주긴 아까워서 사람 마음 갖고 노는 스타일’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친구라는 미명하에 연애를 훼방하는 서새이의 심리는, 서새이의 세포들을 통하여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또한 예민하지 않으면 거슬리지 않을법한 서새이의 행동도 우기의 세포들을 통하여 콕 집어 설명된다. 사실 등장인물들이 왜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며 느꼈는지를 일일이 설명하는 이러한 방식은 다소 구구절절한 일이지만, 그 설명이 각각의 세포들을 통해 재치 있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매끄럽게 느껴진다.



△ 서새이는 친구라는 연막(70연막탄)을 이용해서 구웅에게 접근하거나, ‘우리’라는 말을 앞에 붙임으로서 유미를 자극한다.
그리고 세포들은 이러한 서새이의 행동이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것을 집어낸다.




1)  ‘쿠키’는 네이버 웹툰의 화폐이다. 쿠키를 소비하여, 웹툰의 다음 회차를 미리 볼 수 있고, 이 행위는 종종 ‘쿠키를 굽는다.’고 표현된다. 쿠키는 유료이기 때문에 ‘쿠키를 굽는다.’는 것은 ‘작품의 뒷내용이 너무 궁금하여 유료결재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2) ‘여자 사람 친구’의 준말. 애인을 뜻하는 ‘여자친구’와는 달리 단순히 성별이 여자인 친구를 뜻한다.

 이렇듯 둔감한 사람들이 본다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뒤틀린 말로 조잡하게 표현될 법한 서새이의 행동도 세포들이 친절한 묘사와 함께 명쾌하게 해설해 준다. 남녀 관계에 일어날 수 있는 애매모호한 사건의 저변에 깔린 심리를 마치 인터넷 강의처럼 낱낱이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역량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결국 유미는 서새이의 방해를 극복한다. 심지어 고리타분한 권선징악적 구도에 의한 수동적인 극복도 아니다. 일련의 방해를 겪으면서 유미는 세포들과 함께 성장하고, 그러한 성장이 서새이의 방해를 물리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성숙의 과정은 뇌내 랜드의 상황을 통해 중계된다.

 이제 방해꾼 서새이도 없어졌으니, 여자주인공인 유미와 구웅의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이 응당하다. 디즈니 식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든, 아침드라마처럼 ‘우웩’ 하며 임신 입덧으로 행복한 2세 탄생을 예고하며 끝나든, 주말 드라마처럼 ‘10년후’라는 자막과 함께 여전히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든, 주인공이 사랑의 결실을 맺은 시점에서 깔끔하게 끝나는 것이 보편이다.

 하지만 현실이 대부분 그렇듯이 유미와 구웅은 결국 헤어졌다. 그리고 남자주인공인줄 알았던 구웅이 유미와 결별하자마자, 새로운 남자 유바비가 등장했다. 작품 내에서도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로 설정된 유바비는, 여타 매너나 눈치까지도 잘 갖춘 완벽한 남자로 묘사된다. 심지어 유바비는 유미가 좋아하는 떡볶이까지 잘 만드니 이보다 더 완벽하기 어렵다. 독자들은 어느 하나 부족한 점 없는 유바비를 보며 지질한 전 애인인 구웅을 남자 주인공 후보에서 지웠다. 시기적절하게 등장하여 결국 연인이 된 유미와 유바비를 보며 독자들은 ‘역시, 남자 주인공은 구웅이 아니라 유바비였다.’며 열광했다. 후에 유미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구웅의 애달픈 서사가 밝혀졌고, 게임회사 CEO로 성공한 구웅이 다시 유미에게 대시했다. 하지만 구웅의 순정에 감복한 독자보다는 유바비 쪽으로 돌아선 독자가 더 많았다. 이제 유바비와의 해피엔딩은 기정사실인 것 같았다. 유바비가 유미에게 반지를 선물한 순간 독자들은 이번에야말로 디즈니식, 혹은 드라마식의 해피엔딩을 기대했다. 유미와 유바비를 표지로 한 굿즈까지 등장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역시 현실이 종종 그렇듯이, 유미는 유바비와도 헤어졌다. 그리고 그 이별은 수려했던 유바비의 외모와는 달리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너저분한 이별을 목도한 독자들은 분노했지만 마지막에는 구웅도 유바비도 남자 주인공이 아니었단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미는 결국 구웅도 유바비도 아닌 ‘신순록’과 결혼했다. 봄 같은 ‘우기’, 여름 같은 ‘구웅’, 가을 같은 ‘유바비’를 거쳐 이름마저도 겨울 같은 신순록이랑 결혼한 셈이니 진정한 남자 주인공은 처음부터 신순록이었다 하는 생각도 든다.



△ 왼쪽부터 ‘우기’, ‘구웅’, ‘유바비’, ‘신순록’. 꽃 축제를 같이 갔던 우기는 봄이, 그을린 피부에 샌들을 즐겨 신는 구웅은 여름이,
단정한 갈색톤 세미 정장을 즐겨 입는 유바비는 가을이 연상된다. 그리고 신순록은 ‘루돌프’라는 영어이름부터 겨울이 연상된다.


 그러나 이 즈음 되면 일전에 ‘게시판 세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운명은 없고 선택만이 있을 뿐이며, <유미의 세포들>의 주인공은 유미밖에 없다는 말.




△ 유미의 생각을 정리하는 게시판 세포. 「유미의 세포들」의 유일한 주인공은 유미이다.


 그러고 보면 게시판 세포의 말이 맞다. 현실에서도 내 인생에 주인공은 나뿐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신순록도 유미 인생의 남자 주인공은 아니다. 신순록은 유미의 운명의 상대가 아니라, 유미가 ‘선택’한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30대 유미 인생의 절반을 함께 해온 독자들은 유미가 한 그 선택이 최선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기와 구웅, 그리고 유바비를 거쳐 유미가 얼마나 성숙해 졌는지 5년간 봐 왔기 때문이다. 비록 작품이 완결되어 유미의 결혼생활은 감상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의 유미는 행복할 것이다. 유미 인생의 유일한 주인공으로서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