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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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넘어서

2021-01-12 김재훈



가면을 넘어서



살면서 한 번쯤은 여느 만화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물론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처럼 상대방의 진심을 안다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있으면 가장 요긴하게 쓸 것 같은 능력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는 왜 타인의 마음을 알기를 원하는 걸까. 미지(未知)는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체를 바라볼 때 단면만 보고 어떠하다고 단정 짓기는 쉽지 않다. 그 이면까지 확인해야 비로소 어떠한 물체인지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이면까지도 볼 수 있어야 하지만, 우리는 상대방의 단면만 파악할 수 있을 뿐 그 이면을 알 수는 없다. 겉은 웃고 있지만 속은 울고 있는지 나를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단면만 보고는 알 수가 없으니 착각, 의심, 추측으로 그 이면을 상상하면서 다양한 감정에 휘말리게 된다. 이 소용돌이는 매우 강력해서 이성적인 판단을 불가능하게 하고 오해를 낳거나 나쁜 선택을 하게 만드는 등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상당하다. 차라리 세상 모든 사람이 표리일체가 된다면 의사소통이 편하겠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요즘 같은 멀티 페르소나 시대에는 쓸데없는 공상일 뿐이다.

 

페르소나란 그리스어로 가면이라는 의미로, 현대인들은 다양한 가면을 쓰고 생활한다. 직장에서, 퇴근 후 집에서, 취미생활을 할 때, 친구들을 만날 때와 같이 각기 소속된 조직과 집단에 따라 거기에 알맞은 정체성이 발현되는 것이다. 이는 인터넷과 SNS에서도 마찬가지다. 네이버카페, 카카오톡,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각 플랫폼에 따라 무언가의 열혈 팬이 될 수도 있고, 감성 넘치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유쾌한 희극인이 되기도 한다. 이미 미디어에서도 멀티 페르소나를 이용한 컨텐츠가 유행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놀면 뭐하니>, 래퍼 마미손, 펭수가 바로 그렇다. 물론 그들이 실제로 누구인지는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대중들은 그들이 캐릭터를 연기한다고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인격체로서 바라보고, 컨텐츠를 소비하는데 전혀 거부감이 없을 만큼 멀티 페르소나는 우리 사회에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점점 늘어가는 우리의 가면이 나와 타인의 이면을 더욱 미지로 만들어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장애물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실망할 필요

는 없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창작물을 통해 이상적인 세계를 간접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이버웹툰 <방백남녀>는 두 남녀의 인간관계를 다루고 있다. 희곡이나 시나리오에 쓰이는 대사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는데, 대화, 방백, 독백이 바로 그것이다. 작품 제목에 쓰인 방백이란 극 중 인물 혼자서 말한다는 점에서는 독백과 비슷해 보이지만, 독백은 등장인물의 심리나 생각을 관객이 훔쳐보는 것이라면, 방백은 다른 인물들은 듣지 못한다는 설정하에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자면 마블의 데드풀을 생각하면 된다. 데드풀이 관객과 배우 사이에 존재하는 제4의 벽을 넘나들며 관객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거나 말을 건네는데 이 행위가 바로 방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방백남녀>의 두 주인공은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네려고 하는 건지 살펴보자.

 

주인공인 민남주와 여주혜는 성별, 환경, 집안, 가치관, 성격 등 모든 것이 다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면 같은 토익학원에 다닌다는 점과 각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는 점뿐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사소한 오해에서부터 시작된다. 학원으로 향하던 중 담배꽁초를 맞은 주혜는 이를 남주가 한 짓이라고 생각해 그를 양아치라며 혐오하던 차에 학원 회식에서 남주에게 막말을 한다. 그러나 담배를 피지 않는 남주는 이러한 사정을 알 리가 없고 자신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하는 주혜를 불편하게 생각하지만, 시간이 흘러 남주의 용기 덕분에 주혜와의 오해가 풀리고 둘은 절친한 친구가 되는 것이 작품 초반까지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남주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주혜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지만, 곧바로 주혜의 시선에서 같은 상황을 다시 한번 서술하면서 주혜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이렇게 같은 상황을 각각 다른 시점으로 교차해서 서술함으로써 서로 간의 오해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사람에게는 악의가 없는데 오해가 쌓인다는 점이 바로 인간관계의 아이러니다. 이마저도 우리는 독자의 전지적 시점에서 관찰했기 때문에 각자 행동의 당위성을 인지하는 것일 뿐, 우리가 그들을 이해한다고 해서 두 사람의 오해가 저절로 풀리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오해라는 매듭을 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결자해지뿐이다. 즉, 스스로 저지른 일은 스스로 풀어야 하는 것처럼 상대방에게 먼저 다가가 소통을 시도해야 한다. 물론 상대방이 당신의 진심 어린 소통을 거부하거나 되려 지독한 말로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두렵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야 한다. 오해를 풀 수 있는 것은 대화뿐이라는 것을, 시도하지 않으면 변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두 사람은 말해주고 있다.



 작품 초반까지의 이야기가 오해를 풀고 친구가 되는 과정이었다면, 중후반부에는 각자의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과정을 담고 있다. 소통만능주의라고 해도 어쩔 수 없으나, 이번 해답 역시 소통이다. 남주는 어렸을 적부터 축구선수를 꿈꿨지만 실패한 과거의 소유자다. 그 과정에서 동료의 불행을 보고도 지나친 것,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 자신에겐 재능이 없다는 좌절감 등의 감정에 짓눌려 존경하는 감독인 아르센 뱅거의 환영에게 인격모독을 당하고, 축구 포스터만 봐도 코피를 흘리는 심각한 트라우마를 가지게 됐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주혜가 남주에게 축구 이야기를 꺼내자 남주는 화를 내며 주혜에게 폭언을 가한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의 사이는 처음보다도 냉랭해지지만, 이번에도 남주는 주혜에게 자신의 트라우마에 관해 이야기하며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한다. 타인에게 자신의 트라우마를 말해준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 일이다. 주혜 또한 남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아무 의심 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지?”, “내가 앞에선 내색 안 해도 뒤로는 실망하는 사람이면 어쩌려고”, “다른 술자리에서 너를 안줏거리 삼으면 어쩌려고”, “홧김에 너에게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면 어쩌려고”라는 생각을 가지지만, 남주의 이야기를 듣고 주혜 역시 자신의 과거와 마주보기로 결심한다. 주혜는 절친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스트레스를 할아버지에게 소비함으로써 자신을 유일하게 사랑해줬던 할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했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고, 이로 인해 인간 불신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남주에게 털어놓는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각자의 트라우마 공유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마주 보고, 극복하고, 공감하면서 한 걸음 더 성장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남주와 주혜의 이면에는 트라우마가 있었으나. 개개인의 이면은 어떤 모습인지 자신 말고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대부분 사람은 자신의 이면이 드러나지 않게끔 가면을 쓰지만, 역설적으로 이면을 드러낼 때야말로 비로소 가면 너머의 서로를 알아가는 순간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현실에서는 <방백남녀>처럼 서로 간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이면을 드러내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개인마다 정체성의 종류는 다양해졌을지 몰라도, 되려 정체성의 기반은 부실해지는 멀티 페르소나 시대. 가면 속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더더욱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고, 소통해야 한다. 내가 상대방의 이면을 들여다본다면, 상대방 또한 나의 이면을 들여다볼 것이다. 진정한 소통이란 상대방을 알아감과 동시에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