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즘을 배제하기 위해 긍정적으로 바라보기'의 리얼리즘* (* 본 글의 제목은 <실종일기>의 첫 나레이션인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리얼리즘을 배제한 채로’를 의도적으로 비틀고 있습니다.)
예전의 일이다. 우연히 나가게 된 자리에서 한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과 마주하게 되었다. 작업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내가 '다큐멘터리적인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그 감독은 즉시 옆자리의 동행에게 "이사람 다큐멘터리처럼 만화를 한대!"라며 신기한듯 말을 건냈다. 그의 세계에서는 만화와 기록은 연결될 수 없는 이야기인 모양이다.
당연히 만화에도 뛰어난 다큐멘터리 작품들이 있다.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 기 들릴의 <평양> 혹은 <굿모닝 예루살렘> 등. 가족의 역사를 취재했다는 의미에서 아트 슈피겔만의 <쥐>와 안토니오 알타리바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역시 르포르타주 만화이며, 페드로 리에라의 <인티사르의 자동차> 모든 취재의 결과를 하나의 이야기를 각색하긴 했으나 인터뷰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르포르타주 만화로 기억할 수 있다. 르포르타주 만화가 아니더라도 자기 고백의 만화들도 훌륭한 기록(다큐멘터리)이 된다. ,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는 너무 많이 거론되어서 식상할 정도이다. 권용득의 <예쁜 여자>나 앙꼬의 <나쁜 친구>, 오사 게렌발의 <7층> 등 따지고 보자면 셀 수도 없다.
아마도 '기록'과 '만화'는 속성적으로 섞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기록'의 핵심은 재현의 리얼리티로 환원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이들에게 있어 기록이란 '사진적 존재론' 즉, 바쟁적 의미에서의 리얼리즘과 상통한다. 근본적으로 사실의 재구성이 될 수 밖에 없는 만화는 이 단계에서 기록으로의 가치를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바쟁조차도 기록의 재구성을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바쟁은 관객을 속이려는 의도가 없으며, 그 재현이 기존의 속성과 충돌하지 않을 때라면 재구성 역시 여전히 리얼리즘의 틀거리 안에 있다고 말한다. 이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만화의 리얼리즘을 모두 바쟁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수용자인 우리가 가진 리얼리즘의 범주를 만화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확장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전혀 다른 방향의 작품에 대해 말할 생각이다. 자전적이라는 면에서 충분히 기록 만화로 분류할 수 있음에도, 작가 스스로 '가능한 한 리얼리즘을 배제했다'고 주장하는 만화 말이다.
아즈마 히데오의 <실종일기>는 연재로부터 도주해 스스로 노숙생활을 선택했던 1989년과 재차 도주해 배관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던 1992년의 기록을 담은 만화이다. 후반에 알코올 병동에 입원하게 된 1998년의 이야기도 살짝 첨가되어 있지만, 해당 이야기는 2권인 <실종일기 2 : 알코올 병동>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진다. 쓰레기를 뒤지고 모포를 덮고 자는 생활을 복기하는 만화이면서, 아즈마는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리얼리즘을 배제한다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첫번째 실종을 다룬 전반부는 그다지 정리할만한 서사가 없다. 아즈마는 도주했고, 어딘가의 아파트 뒷산에 모포를 깔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간다. 먹을 것은 음식 쓰레기 봉투에서 찾아내고, 식수는 빈 병을 이용해 채워 마신다. 포만감을 준다는 이유로 매일 아침 튀김용 기름을 마시는 것은 예사다. 게다가 음주와 흡연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빈 술병과 버려진 담배꽁초를 찾아 사방을 뒤진다. 그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부랑자라며 눈총을 받고, 경찰에게도 의심받을 때가 있으며, 상한 음식을 먹고 탈이 나기도 한다.
설명할 필요 없이, 이런 생활은 당연히 괴롭다. 대다수의 독자가 노숙 생활을 경험해봤을 리 없기에 이를 경험적으로 결론지을 수는 없겠지만, 상한 식빵에서 하루종일 곰팡이를 긁어내고, 습기가 차 축축해진 모포 안에서 비오는 날 내내 지내는 것이 괴롭지 않을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만화의 아즈마는 거의 괴로운 표정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더 놀랍게도, 괴로운 표정보다 더 많이 나오는 건 아즈마의 해맑은 표정이다.
아즈마는 의도적으로 이 노숙생활을 '즐거운 생활'로 포장한다. (실제로 본 작품으로 2005년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에서 만화부문 대상을 수상한 히데오는 단상에 올라 '노숙 생활은 꽤 재밌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때 그가 사용하는 기호는 오직 캐릭터의 얼굴 하나다. 그는 노숙 생활 전반에서 그의 캐리커처에게 '웃음'을 부여함으로써 이 생활이 가진 근본적인 괴로움을 은폐한다. 물론 그렇다고 노숙 생활을 통해 어떠한 삶의 진리나 철학적 깨달음을 얻은 것을 묘사하지도 않는다. 그는 오직, 노숙 생활 그 자체가 즐겁다는 듯이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다.
그 웃는 얼굴을 통한 은폐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즈마의 첫 실종은 원고가 한창 진행되던 도중이었다. 집에는 아내와 (작품에서는 전혀 묘사되지 않는) 두 아이가 있었다. 또한 그의 만화가 연재되던 잡지가 있었을 것이고, 그를 담당하던 담당 편집자가 있었을 것이다. 아즈마의 도주란 이런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가져다주는 행위나 다름없다. 그와 관계된 가족들, 작업과 관계된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아즈마의 실종에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실종일기>에서는 이들에 대한 그 어떠한 묘사도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종종 아내가 등장하긴 하지만, 아내의 반응은 우리의 상상보다는 축약되어 표현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아즈마는 병동에 들어간 3부에서 '이혼 당할지도 모른다'라고 한다. 그에 비하면 본 편에서 보이는 아내의 반응은 매우 약소해 보인다.) 이는 서사에서의 배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즈마가 노숙 생활의 도중 얻은 작은 행복을 통해 웃는 얼굴을 보여줄 때마다, 우리는 그 배경에 있을 어떠한 고통들을 감지하지 못하게 된다.
주인공의 얼굴은 감정의 표출구이며, 감정은 서사의 추동을 주도한다. 이 아즈마의 행복에 찬 표정은 지속적으로 엄습하는 현실적 위기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독자들은 그 안에서 '꿋꿋히' 웃음을 유지하는 아즈마에게 집중하게 될 수 밖에 없다. 비록 웃는 얼굴이긴 하지만 이는 위기를 끝없이 인내하는 버스터 키튼의 데드판(Dead pan:무표정)과 유사한 작동을 일으킨다. 아즈마의 자업자득에 대한 조롱도, 혹은 노숙의 삶에서 겪는 위기에 대한 측은함도 모두 아즈마에게만 집중되게 만들어,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삭제되어버리는 것이다.
<실종일기>는 바쟁이 제시한 두 가지 조건 중 첫번째 '수용자를 속이려고 하지 않을 것'을 배반하고 있다. 아즈마가 웃는 얼굴을 통해 너무나도 당당히 자신의 다른 조건들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번째 조건인 '기존의 속성과 충돌하지 않을 것'에 대해서는 어떨까.
어쩌면, <실종일기>에서 가족과 업무를 제거했다는 사실이 곧 아즈마의 실종 이후의 속성과 연결될지도 모른다. 집과 일터에서 도망친 아즈마는 실제로 '그들에 관해서 전부 잊은 채로' 노숙 생활을 이어나갔을 수도 있는 것이다. 거리에서의 생활, 모포를 덮고 뒷 산에서 자며 먹다 남긴 음식을 먹는 생활이 그 전의 생활보다 더 많은 웃음을 줬다면, 그 웃음이 각색된 무언가가 아니라 실제의 웃음을 재현한 것이라 상정한다면, 그래서 그 즐거움이 이전의 생활을 머릿 속에서 완전히 날려버렸다면 이 웃음은 무엇과도 충돌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처럼 노숙의 와중에는 과거의 삶을 완전히 제거해야 리얼리즘의 조건에 부합할 수도 있다. (물론 그가 가족과 직장에 대해 사후에 알게 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모든 혐의로부터 결백하기는 좀처럼 힘들 것이다.)
만약 이 작품이 사진이었다면, 혹은 노숙하는 아즈마를 쫓아다닌 영상 카메라의 촬영 소스였다면 그가 진짜로 웃었는지 웃지 않았는지 정확히 확인이 가능했을 터이다. '사진적 존재론'이란 그러한 작동을 말하며, '그것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리얼리즘을 구성한다고 한다. 결국 사진적 존재론의 관점에서는 만화의 기록이란 단면으로만 만들어진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허나, 바쟁이 다큐멘터리 영화 <콘-티키>에 대해 거론하며 '폭풍우가 지난 이후의 영상'이 폭풍우의 조건을 더욱 정확하게 만드는 (폭풍우에 대비하기 위해 촬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비추는) 리얼리즘이라 발언한 내용을 떠올려보자. 바쟁은 오직 당시의 기록만이 리얼리즘을 담보한다고 한 것은 아니다. 사후에 재구성된 시각적 결과물이 당시를 재현할 수 있을 때, 그곳에서도 역시 리얼리즘이 탄생할 수 있는 조건으로 간주했다.
만화적 기록은 결코 동시적이지 않다. 모든 만화적 기록은 사건의 사후에 재창조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바쟁이 전제한 조건, '기록자가 그 장소에 있었을 것'은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 말하자면 만화 기록은 당연하게도 사진적 존재론의 전제를 모두 부합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만화 기록은 근본적으로 정확한 현실이 아니다. 만화 기록이란 그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쥐>를 보며 유대인이 쥐처럼 생겼으며 독일인이 고양이처럼 생겼음을 '기록적인 관점에서' 수용하지 않는다. 쥐와 고양이의 캐리커쳐는 재현을 위해 사용되는 조건적 기표일 뿐이며, 모든 수용자는 그것을 이미 전제한 상태로 기록을 받아들인다.
그렇다. <실종일기>의 가장 첫번째 컷, '리얼리즘을 배제한다'는 오직 아즈마의 노숙 재현에만 적용되는 조건이 아니다. 우리가 만화기록을 볼 때 가장 먼저 전제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볼 이미지 기호가 '결코 리얼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현실적이지 않은 기호들을 보는 대신, 그것들을 조립함으로써 그 안에서 재현되는 현실을 본다.
우리는 웃음의 기호를 통해 정확히 당시에 아즈마가 지우고 싶어했을 현실들을 본다. 아즈마가 사후에 애써 지우려한 흔적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무엇을 신경쓰고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웃음의 행복, 모사의 두려움은 사후 재현자인 아즈마에 의해 선택된 결과이며, 기호로써 새겨진 텍스트다. 아즈마가 <실종일기>를 '리얼하면 그리기도 어렵고 괴로우니까'라는 대사로 시작한 이유는 그게 그의 솔직한 심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그 태도는 사후의 시각 재현물이라는 개념에서 '기록 만화'의 기초적인 태도를 설정한다. 만화 기록의 리얼리즘이란 재현의 태도가 설정되는 것, 그 결과로써의 기호와 동시에 기호화 되는 과정 그 자체가 당시의 현실과 연결되는 것을 말한다. 설령 모된 현실이라고 해도 현실 투사 이상의 현실을 표출할 수 있다면, '사진적 존재론'만이 현실을 반영한다고 단언할 수 없다. 양자는 다른 현실을 모사하며, 이 모두가 현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지해야 한다.
결국 그러면 무엇이 가장 현실적인가? 아쉽지만 모든 기록이 완벽한 현실을 반영할 수 없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건 투사된 이미지를 모두 믿는 태도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아즈마의 웃음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 찾아가는 것, 그 결과로 어떠한 현실과 마주하는 것. 이 또한 우리가 기록으로부터 획득할 수 있는 또다른 현실의 편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