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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존망>, 박태준의 세계관은 어떻게 스스로의 문제의식을 배반하는가

2021-02-03 위근우


<인생존망>, 박태준의 세계관은 어떻게 스스로의 문제의식을 배반하는가






지난 12월 22일 완결된 박태준, 전선욱 작가의 <인생존망> 마지막 장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작품 안에서 서브컬처 오타쿠라는 이유로 따돌림 당하거나 무시당하던 캐릭터인 임슬기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일본인 미소녀가 있다고 주장해왔지만 누구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김진우의 인생을 망친 ‘인생존망’ 사건을 모두 해결하고 다시 현재에서 김진우와 장안철, 임슬기 등이 재회한 마지막 신에서 그 소녀는 실제로 등장한다. 불안한 마음에 “마지막 컷은 (네 키스신이어선) 안 된다”고 외치는 주인공들의 코믹한 모습을 배경으로 임슬기와 소녀의 입맞춤으로 작품은 마무리된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밝은 현재를 맞은 주인공들을 위한 유쾌한 해피엔딩. 하지만 이 장면을 그동안 선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과체중에 오타쿠라는 이유로 ‘아싸’로 몰렸던 임슬기를 위한 배려라고 말해도 될까. 독자의 허를 찌르기 위한 일종의 반전 엔딩이라고 말해도 될까.

 

<인생존망> 마지막 신에서 뜬금없이 등장한 일본인 소녀는 말하자면 그동안 오타쿠라는 이유로 만만하거나 이성적인 인기가 없어 보이던 임슬기가 실은 그렇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등장한 일종의 증명서, 혹은 트로피 같은 장치다. 박태준 작가의 모든 작품에서 꾸준히 반복되는 여성 캐릭터의 대상화 문제를 잠시 차치하더라도, 여기엔 <인생존망>(과 박태준 작품 전반)의 바탕에 깔린 능력주의적 세계관이 조금의 숨김없이 드러난다. 임슬기는 실제 여성보다 2D 캐릭터에 관심을 보이고 서브컬처에 과몰입한 말투 때문에 몇몇 친구를 제외하면 호감을 사지 못하는 캐릭터지만 친구인 김진우를 위해 싸움을 불사하는 정의로운 마음을 지닌 좋은 사람이다. 그걸로 부족한 걸까. 왜 굳이 2D가 아닌 실제 여성과의 키스신으로 임슬기를 소위 정상성의 범주 안에, 미소녀를 쟁취한 ‘인싸’의 범주 안에 넣어야 할까. 단순히 박태준 작가의 세계관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세계관은 결과적으로 그가 작품 내내 비판하고자 한 교내 폭력의 문제를 왜곡한다.

 

작가는 작품 후기에서 “<인생존망>을 그리다보면 매우 폭력적인 이야기들과 가벼운 개그가 공존하다보니 저 스스로도 이런 문제들을 ‘내가 너무 가볍게 다루고 있지 않나’하고 늘 고민”했다고 밝혔다. 아마도 그의 고민과 문제의식은 사실일 것이다. 역사가 바뀌기 전 김진우가 기억하는 과거의 가해자 장안철은 거의 인간망종으로 묘사되며 특히 김진우가 말을 더듬게 되는 네 번째 ‘인생존망’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을 땐 독자들도 장안철에게 크게 분노했다. 박태준 작가의 목적이 학교 폭력과 일진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꽤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폭력을 단지 인성 나쁜 일진의 문제이자 그 일진이 반성하면(여기서는 장안철) 해결될 문제로 본다. 그것이 현재의 장안철이 과거의 김진우 몸으로 환생해 김진우의 ‘인생존망’ 사건을 바로잡고 과거의 장안철을 갱생시킨다는 작품 설정에 깔린 기본 관점이다. 작품 안에서 이를 가능하게 하는 건 결국 김진우의 몸에 들어간 장안철의 프로페셔널한 싸움 실력이다.

 

‘인생존망’ 사건을 해결하는 마지막 에피소드는 김진우 몸 속의 장안철 대 과거의 장안철의 1대1 매치다. 다시 말하지만 박태준 작가는 폭력이 나쁜 가해자가 마음을 고쳐먹어야 끝나는 일로 본다. 강하고 나쁜 가해자가 자기 멋대로 할 수 없는 강제성 있는 규범, 약하든 조금 특이하든 한 사람의 인격으로서 피해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안전망 같은 것은 아예 고려되지 않는다. 작품 말미, 학교폭력위원회의 결정으로 장안철의 퇴학이 결정되긴 하지만 그것은 형식적일 뿐 장안철의 패배와 그 이후 조금 뜬금없는 그의 자기반성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폭력이란 더 강한 폭력으로 제압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 것, 그것이 폭력에 대한 박태준의 얄팍한 도덕관이다. 그러니 장안철을 잡기 위해선 장안철이 나서야 한다. 또한 김진우를 구제하기 위해서도 장안철이 나서야 한다.

 

사실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도 기만적이다. 가해자가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가해자와 싸우며 피해자를 구원해주는 정의의 사도가 되는 동안 피해자는 여전히 수동적으로 지켜볼 뿐이다. 하지만 박태준의 세계에선 필연적인 일이다. 김진우는 약자이며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인생을 바로잡기 위해선 그에 준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가해자와 손을 잡는 일이라 해도. 다시 말해 작가는 약육강식의 학교를 꽤 성공적으로 묘사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약육강식 세계 너머의 윤리적 전망을 고려하지 못한다. 의도하지 않은 묘사겠지만, 박다빈은 장안철과 장안철이 빙의한 김진우에게서 동일한 짐승의 냄새를 맡고 설렌다. 짐승 대 짐승의 대결에서 더 착한 짐승이 승리할 뿐 인간의 도덕이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그 모든 싸움 끝에 남는 것은 정의가 아닌 성공에 대한 열망뿐이다.

 

모든 ‘인생존망’ 사건을 해결하고 김진우의 몸에서 벗어나 다시 현재로 돌아온 장안철은 자신의 과거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사과하려 하지만, 그의 ‘1등급 노예’ 4인방은 각각 성공한 의사, 만화가, 축구선수, 영화배우가 되어 과거 그의 괴롭힘은 잘못됐지만 그 계기로 성공했으니 그걸로 됐다고 말한다. 노예 4인방의 해피엔딩을 위한 설정이라 해도 이 사과와 용서는 너무나 기괴하다. 사과의 진정성은 가해의 결과적 성공으로 대체되며, 용서는 성공한 자의 여유로 대체된다. 학교 폭력을 비판하되, 능력과는 상관없이 누구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기준을 제대로 세우지 않은 박태준의 세계관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등한 만남은 오직 자수성가한 두 어른의 이미지로만 상상된다. 그러니 장안철의 도움으로 인생을 고친 김진우가 “너랑 나는 같은 인간인데 왜 나는 하지 못할까”라며 과거의 부족한 자신을 탓하는 자기 부정적인 결말이 등장하는 것이다. 과연 이것을 학교 폭력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라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학교 폭력에 대해 잊지 말아야 할 건 잘 나간다고 못 나가는 친구를 때리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잘 나가고 못 나가는 걸 나누는 그 기준과 서열이 폭력을 생산하고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 질문한다. 성인이 된 임슬기의 자기 증명이 꼭 그렇게 잘 나가는 남자 대한 통념적 기준에 맞춰 그려져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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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근우

작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