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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기(女命記)> :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선언

2021-03-03 이한솔




《여명기(女命記)》 :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선언


 ‘여명기(黎明期)’는 새로운 문화나 시대가 찾아오는 시기를 의미한다. 희망과 포부가 담긴 이 단어와 동일한 발음의 제목을 선택한 책이 있다. 바로 텀블벅 후원을 통해 제작된 여성 서사 단편만화집 《여명기(女命記)》다. 책에 실린 열두 편의 작품들은 모두 두 가지 조건을 따른다. 여성이 주인공일 것, 로맨스가 아닐 것. 상업적 성공을 위한 요소와는 일견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여명기》는 보란 듯이 목표 금액의 4756% 모금을 달성해냈다. 이후 위즈덤하우스에서 다시 한 번 단행본으로 제작됨으로써 《여명기》는 증명해냈다. 새로운 시대의 여성 독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 콘텐츠는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져야 하는지.

 


남수, <남해>


AJS 작가의 〈플랑크톤의 귀향〉과 남수 작가의 〈몽해〉는 바다를 중심 소재로 삼았다. 두 작품이 주목하는 것은 좌절의 묘사나 체념의 정서가 아니라, 바다라는 공간으로 상징되는 자유와 희망이다. 〈플랑크톤의 귀향〉에서는 “그녀의 꿈은 멀리 있지 높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여명기 上권 p.19)”, “듣다 보면 가능할 것 같거든 (여명기 上권 p.24)”, “목적지가 보이는 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 (여명기 上권 p.24)” 등 희망이 담긴 문장이 거듭 등장한다. 그리고 〈몽해〉는 양 페이지 가득 담아낸 아름다운 풍경을 통해 “가끔 무섭지만 싫지는 않은 자유 (여명기 上권 p.240)”의 즐거움을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이처럼 여성 화자의 삶과 미래를 긍정하는 담백한 태도가 두 작품의 매력이다.

하토 작가의 〈세상은 거대한 거짓말〉 또한 바닷가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이 작품은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구분되지 않는 거대한 암흑 속에서 주인공 ‘첫눈’이 서있는 컷으로 시작한다. 그 거대하고 압도적인 고독. ‘첫눈’에게 세상이란 거대한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외롭고 엉망진창인 곳이다. 아버지는 개같이 굴다가 사라져버리고, 어른들은 조언이나 도움을 주지 않는다. ‘첫눈’이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 역시 그가 표준에서 비껴선 소외의 공간에 서있음을 보여준다.

 


하토, <세상은 거대한 거짓말>


이토록 외로운 세상 속에서 ‘첫눈’은 ‘밤바’와 함께 밥을 먹고, 미래의 삶을 생각한다. 위 장면을 볼 때면 한강 작가의 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이 떠오른다. “그때 알았다 /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 지금도 영원히 /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 밥을 먹어야지 // 나는 밥을 먹었다.” 이 시의 화자가 밥을 먹는 것과 ‘첫눈’이 식사를 하는 것은 비슷한 형태의 다짐이 담긴 행위일 것이다. 여전히 삶에는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있고, 세상은 “진짜 웃기지도 않는 짜장”이지만…… ‘첫눈’은 앞으로도 ‘밤바’와 밥을 먹을 것이고, 계속 살아갈 것이다. 첫눈이 다 녹더라도 눈은 계속 내리고 쌓여가는 것처럼.

앵몬 작가의 〈어떤 날〉과 HOSAN 작가의 〈시스터후드〉에도 가족들과 갈등을 겪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떤 날〉의 ‘규연’이 처한 상황은 “왜 그렇게 누나 생각만 해? (여명기 上권 p.70)”라는 남동생의 대사로 요약 가능하다. 한편, 〈시스터후드〉의 ‘해인’은 ‘탈코르셋’과 관련하여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겪는다. 머리를 밀고 여성복을 버리는 ‘해인’에게 모두가 “미친 X”이라고 말하고, 세상은 도저히 바뀔 것 같지가 않다. 그러나 앵몬 작가와 HOSAN 작가는 독자들에게 지치지 말고 계속 나아가자고 말한다. ‘규연’이 가족들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삶을 배워나가는 것처럼, ‘해인’이 자매와 손을 마주잡은 것처럼. 천천히, 조금씩, 함께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자고.



마빈, <노아의 방주>


마빈 작가의 〈노아의 방주〉에는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우정으로 이어져 있는 두 여성이 등장한다. 이 작품은 신종 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한 행성 이주와 관련된 이야기다. 당찬 성격의 꼬마 ‘노아’는 쉘터에서 중년 수의사 ‘미리암’와 친구가 된다. 아름다운 우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야 세상에 차고 넘치지만, 다른 세대의 두 여성이 친구가 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는 그 존재만으로도 독자들에게 신선한 재미와 감동을 전한다.

꾸마 작가의 〈태양이 뜨지 않는 도시〉와 이요 작가의 〈소쩍새의 울음소리〉는 마법과 정령이 등장하는 환상적 세계에서 짝과 함께 나아가는 미래를 보여준다. 〈태양이 뜨지 않는 도시〉의 ‘리베라’와 〈소쩍새의 울음소리〉의 ‘달린’은 모두 불친절하고 불가해한 세상에 던져진 인물들이다. 왜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는지, 어째서 마녀 ‘클로버’가 떠나버렸는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파트너와 함께할 앞날을, 가족과 다시 한 번 만날 미래를 상상하며 여행길을 다짐한다. 그 여정은 분명 혼란스럽고 고된 과정이겠지만…… 좋은 짝과 함께 나아가는 삶이란 분명 외롭지 않은 모험일 것이다.

서각 작가의 〈이스파라의 마녀〉는 《여명기(女命記)》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여성의 ‘기록’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정연’은 20세기 전쟁사에서 지워진 아시안 여성 사병들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해 모스크바에 도착하고, 마침내 구소련의 참전 여성에 대한 기록을 입수한다. 기록 속의 화자는 전쟁터에서의 상실, 고독, 공포… 그 수많은 감정들을 잊혀져버린 여성의 이름을 통해 기억한다. “누가 기억할까? 아 누가… 그녀의 이름을 안단 말인가? (여명기 上권 p.174)”라는 독백과 함께.

뻥 작가의 〈최저임금을 위하여〉에도 다정한 시선으로 기록을 들여다보는 화자가 등장한다. 바로 한국의 모든 대소사를 담당하는 최고성능의 슈퍼컴퓨터다. 이 슈퍼컴퓨터는 아주 평범하고 가난한 청소노동자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자신을 ‘똥강아지’라고 부르는 이 여성을,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는 이 인생을 기억하고자 납치 자작극까지 벌인다. 사람이 ‘인간’이 아닌 ‘비기계’로서 존재하는 시대, 상대를 기억함으로써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이야기. 이 상냥한 이야기가 둥글둥글한 작화의 그림과 함께 독자의 마음속에 부드럽게 파고든다.

마노 작가의 〈Teller〉도 최첨단기술의 인공지능 ‘텔러’를 보여준다. ‘텔러’가 오류를 일으키게 된 고민이란 바로 이것이다. 어떻게 모든 독자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고뇌는 모든 창작자들에게 주어지는 숙제이지만, 여성 창작자들에게 더욱 가혹한 형태로 부여되곤 한다. 최근 완결된 코미코 웹툰 〈에이리언 아이돌〉의 지애 작가는 후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매주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주 작은 실수를 해도 곧바로 추락할 것 같았어요.” 이처럼 여성 작가에게 압박이 가해지는 현실 속에서 ‘은린’은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말한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이야기 같은 건 불가능하잖아요. (여명기 上권 p.24 p.199)”

 


코익, <아구 속에는 무엇이 있나>

코익 작가의 〈아구 속에는 무엇이 있나〉는 친한 직장 동료의 입냄새 때문에 곤란을 겪는 김 대리의 일상을 유쾌하게 보여준다. 입 냄새의 범인이 밝혀지는 마지막 반전에는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피차 평생 그런 어려운 미로 속에서 돌고 있는 처지에 충분히 고민하고 서로에게 너무 냉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그렸습니다.”라는 작가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건 어려우나 타인(특히, 여성작가)에게 냉정하게 굴기는 너무나 쉬운 현실을 곱씹으며.

《여명기》에 참여한 작가들은 모두 여성 작가다. 여성 작가! 그 이름은 지금까지 작가들에게 때때로 일종의 한계로서, 낙인으로서, 꼬리표로서 따라붙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여성 작가라는 정체성이 재능 있는 작가들을 (무려 열두 명이나!) 한 자리에 모으는 추진력이 되는 시대가 왔다. 2021년에도 팀 총명기는 《여명기》 다음 권 제작을 통해 또다시 여성들의 운명을 기록해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2권에서도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대와 흐름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괄호 속 작품 페이지 표기는 텀블벅 후원을 통해 제작된 책을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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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솔

만화평론가
2020 만화·웹툰 평론 공모전 신인부문 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