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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하는 꿈은 아름답다 : <나빌레라>

2021-11-25 김진철


비상하는 꿈은 아름답다 : <나빌레라>


가지 않은 길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간단한 식사 메뉴부터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선택까지 늘 선택의 연속이다. 그러다 보면 그때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학창 시절 대학 진학을 위해 학업에만 열중하던 10대의 시기, 대학 시절 좁은 취업문을 통과하기 위해 온갖 스펙을 쌓는 데 시간을 보낸 20대의 시기, 취업 후 직장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던 30대의 시기, 결혼 후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던 40대의 시기, 은퇴를 앞두고 있던 50대의 시기, 황혼을 맞이한 60대 이후의 시기 등 누구에게나 인생의 각 시기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끼는 순간, 아마도 가슴 속에 가장 미련이 남는 일이 떠오르지 않을까.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할 것이고, 누군가는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꿈꾸던 일들을 하나씩 해보고 싶어 할 것이다. <나빌레라>의 덕출에게는 발레가 그런 일이었고, 덕출의 친구에게는 사진가가 되는 것이었다. 덕출은 어렸을 때 러시아에서 우연히 보게 된 발레에 매료되었지만 주변 여건 때문에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만 있었다. 덕출의 친구 만석도 가족을 부양하다 보니 서랍 속에 마지막 남은 카메라를 넣어두는 것 정도로만 미련을 남겨두고 있었다. 언젠가는 해보고 싶었으나 쉽게 용기를 내지 못했던 일들. 만석은 죽기 전까지 끝내 카메라를 들 수 없었지만, 덕출은 70이 되는 나이에 용기를 내어 발레리노의 옷을 입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자신이 가지 않았던 길에 한 발을 내디뎠다. 



△ <나빌레라> 1부 1화 中


만화에서는 두 가지 모습의 덕출이 나타난다. 하나는 가장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성격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추구하는 성격이다. 전자가 70대 이전까지의 덕출이라면, 후자는 발레에 대해 진심을 보이는 시기의 덕출이다. 이 두 가지 성격은 아들 캐릭터에 투영되어 있다. 덕출의 큰아들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다. 장남으로서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성장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니 가족공동체에 틈이 생길만한 상황에 대해 거부감을 보인다. 그래서 큰아들은 덕출의 도전이 탐탁지 않다. 가족들을 생각하지 않는 선택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반면에 막내아들은 반대의 성격이다. 자유분방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왔다. 남들이 보기에는 불안정한 삶으로 보일지 몰라도 스스로의 만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늦은 나이의 아버지의 도전을 응원한다. 

두 아들의 삶은 덕출의 이면을 표상하는 캐릭터들이다. 가족을 중심에 두는 큰아들의 삶은 지금까지 살아온 덕출의 외적인 삶을 그대로 재현하는 캐릭터다. 덕출은 성실하게 자라 준 큰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큰아들의 삶은 덕출이 가정에 충실한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한 보상과도 같다. 반면에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해나가는 막내는 자신의 꿈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덕출의 내면을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덕출은 막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제지하거나 장남과 같은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행동들을 독려하고 지원해 준다. 덕출은 막내아들을 통해 자신이 가지 않은 길을 대리만족하고 있던 것이다. 큰아들이 아버지의 외적 자화상이라면, 막내아들은 아버지의 내적 자화상이다. 


포기하는 것을 포기하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포기하며 살아왔을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뭐든 시작하기 적당한 시기가 있다. 그 시기를 지나치면 여러 난관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덕출이 발레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부딪힌 벽은 가족들이었다. 가족들은 발레라는 낯선 운동을 하겠다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발레리노의 복장을 보고 기겁하는 가족들을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기에 신체적인 한계도 만만찮은 벽이다. 몸으로 표현하는 발레는 아무래도 나이가 들수록 따라하기가 더욱 어렵다. 더구나 알츠하이머라는 병이 점점 심해지는 상황은 심리적으로도 당장에 포기하고 싶은 상태로 몰아간다. 그렇지만 덕출은 가족들이 반대한다고 해서, 늙었다고 해서, 병에 걸렸다고 해서 그것을 쉽사리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한다. 그리고 스스로 한계에 도전하는 선택을 한다. 그에게는 발레가 남은 삶의 마지막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런 간절함이 있었기에 그는 끝까지 발레를 포기하지 않고 무대에 설 수 있었다. 



△ <나빌레라> 1부 3화 中

만화에서는 덕출뿐만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삶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덕출이 다니는 발레단의 단원들은 상처가 있거나 기회를 아직 얻지 못한 이들이다. 단장의 발표모임에는 부상과 사고로 정식 발레는 그만두었지만 좋아하는 발레를 이어가는 이들이 등장한다. 특히 휠체어에 탄 상태로 발레를 하는 윤선생의 모습은 포기하지 않는 의지만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도 분명 포기해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미 늦었다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며 포기해버리는 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뻔한 이야기 같지만 그런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일임을 우리는 안다.  

덕출은 자신의 꿈을 위해 열정을 다한다. 발레를 진심으로 대하는 그의 자세는 주변에 영향을 미친다. 덕출에게 발레를 가르치는 채록은 촉망받는 신예였지만 부상을 당한 후 한동안 정체기를 겪고 있었다. 거기에 생계 문제도 해결해야 하면서 발레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스스로가 발레를 진심으로 여기고 있는지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럴 때 덕출을 만났다. 채록은 자신을 쫓아다니는 덕출을 귀찮아했지만 덕출과 지낼수록 발레를 대하는 그의 진정성에 감화된다. 더구나 알츠하이머로 기억력을 점점 잃어가면서도 발레를 포기하지 않는 덕출을 보며 발레를 하고 있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고 부단한 노력 끝에 정상의 발레리노가 된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처한 상황을 어떻게 대하는 가에 따라 그 시간은 다르게 다가온다. 조선 시대 정치적인 이유로 유배를 가야 했던 선비들 중에는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나름의 방법으로 그 기간을 견뎌내는 이들이 있었다. 글씨에 관심이 많았던 김정희는 글씨를 열심히 연습해서 추사체의 경지를 한 단계 더 올려놨고, 정약용은 그동안 자신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수백 권의 책으로 만들어 냈다. 창작활동에 몰두해 <구운몽> 같은 작품을 완성한 김만중도 있다. 이들은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 스스로도 매번 얼마나 많은 포기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든 이유를 찾아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나중에 보면 그것이 다 하찮은 변명거리였음을 깨닫곤 하지만 말이다. 하루하루가 참 소중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 와 닿지 못하는 것은 아직 인생의 지혜가 부족해서 일 거다. 포기를 하는 순간 앞으로 펼쳐질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 포기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꿈이 날아오를 수 있게 하는 첫걸음이 아닐까. 

필진이미지

김진철

동화작가, 만화평론가
《낭이와 타니의 시간여행》, 《잔소리 주머니》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