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90년대는 만화잡지의 시대였다. 아이큐점프에서 드래곤볼을, 소년챔프에서 슬램덩크를 연재하며 두 만화잡지는 출판 만화 시장을 이끌었다. 독자는 만화잡지 편집부의 큐레이션에 따라 만화를 접할 수 있었다. 독자가 의견을 표현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독자가 편집부에 엽서를 보내면 편집부에 의해 선별된 독자 의견은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만화잡지에 실렸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디지털 만화로의 환경변화는 만화잡지 편집부에 있던 만화 소비 결정권을 독자에게 넘겼다. 독자의 댓글은 이제 실시간으로 반영되고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은 댓글은 ‘베댓(베스트댓글)’이 되어 영향력을 미친다. 그리고 독자는 자신의 취향을 따라 웹툰을 소비한다. 플랫폼은 독자의 취향을 반영하여 작품을 추천한다. 플랫폼이 추천한 작품은 네트워크 효과에 의해 아무래도 더 많이 소비될 가능성이 높고, 알려질 기회가 비교적 적은 작품은 연재가 끝날 때까지 묻힐 가능성이 높다.
<오피스 누나 이야기>는 연재가 끝날 때까지 그리 인기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올해 초 우연한 기회로 읽은 이후 필자가 지인들에게 아무리 이 작품을 추천해도 요일별 순위는 별로 오르지 않았다. 연재를 마칠 무렵 한 대선 후보가 이 작품을 언급한 덕분에 최종화는 요일별 순위 13위까지 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요즘 웹툰에는 네트워크 효과가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2.
사람마다 장르 호불호가 있다. 필자는 어려서부터 RPG 게임과 저패니메이션(Japan+ Animation)에 심취한 판타지 덕후다. 로맨스 장르 웹툰도 읽기는 하지만 판타지에 비할 바는 못 된다. 판타지가 아닌 로맨스임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웹툰은 바로 <오피스 누나 이야기>다. 올해 많은 웹툰을 리뷰했지만 가급적 이 작품의 리뷰는 피하고 싶었다. 리뷰를 쓰려면 작품을 분석하면서 읽어야 하는데, <오피스 누나 이야기>의 설렘과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피스 누나 이야기>는 2021년 12월 완결되었다. 필자는 올해 초부터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지만 읽다 멈추기를 반복하면서 아주 천천히 읽었다. 스토리가 쌓여있는 웹툰은 스토리가 주는 재미 때문에 보통 이틀 정도면 정주행한다. 하지만 <오피스 누나 이야기>는 위에서 밝힌 이유로 쉽게 다음 화로 넘어가는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리뷰를 쓰기 위해 읽다가 멈추기를 여러 번 반복하면서 정주행을 했다. 역시나 이 작품이 주는 설렘과 먹먹함 때문에 감정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3.
<오피스 누나 이야기>는 성숙한 어른들의 연애를 다룬,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이다. 미혼의 남자 주인공 ‘손책임’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손책임은 직장에서 TF업무를 통해 알게 된 일 잘하고 예쁜 누나 ‘안책임’을 좋아한다. 안책임과 가까워지려는 순간 그녀는 선을 긋는다. 알고 보니 그녀는 딸을 가진 워킹맘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아쉬워하는 손책임. TF를 마치고 각자의 부서로 돌아갔지만 손책임은 아무래도 안책임을 잊을 수 없다. 우연한 기회에 다시 안책임과 가까워지면서 그녀가 남편과 이혼 조정 중임을 알게 된다. 일 잘하는 예쁜 누나 안책임과 가까워지고 싶은 손책임, 앞으로 그녀와 어떤 관계를 맺어나갈까?
이 작품은 일단 제목이 확 끈다. 제목을 단어별로 분해하면 오피스와 누나, 그리고 이야기다. ‘오피스’라는 공간이 주는 클리셰적 이미지와 연애 대상으로서 ‘누나’가 가지는 성숙한 이미지, ‘썰’이 연상되는 ‘이야기’라는 단어가 결합하여 제목이 시선을 끈다. 하지만 제목만 그런 것은 아니다. 남자 주인공 손책임의 시점에서 예쁘고 일 잘하고 사연도 있는 여자 주인공 안책임을 바라보는 순수함은 남성 독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여 웹툰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하다.
4.
성숙하다는 것은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우지 않고 상대방의 상황이나 처지를 고려하여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손책임과 안책임은 결혼 적령기에 있는 미혼 남녀의 연애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들의 감정에만 충실한 연애를 하기에는 장애물이 너무 많다. 사회적 시선은 제쳐두고서라도 자신들 내면의 고민이 너무 크다.
결정적인 장애물은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이다. 두 사람은 감정에 충실하면서도 서로의 상황을 최대한 배려한다. 마트에서의 만남은 두 사람의 상황과 내면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손책임이 어머니의 친구들과 함께 마트에 왔다가, 딸과 장을 보는 안책임을 만난다. 둘은 서로 반갑게 인사했지만, 그 둘을 보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친구들은 둘의 관계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손책임이 곤란할까봐 한발 물러서는 안책임의 마음과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해 미안해하는 손책임의 마음이 무척이나 안타깝다. 인스턴트 만남이 유행이고,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미성숙한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 요즘의 현실과 상대방을 사랑하지만 충분히 배려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대비되는 것은 필자의 기분 탓일까?
5.
<오피스 누나 이야기>는 여성 독자의 전유물로써의 로맨스 만화가 아니라 남성 독자들도 읽을 수 있는 새로운 로맨스 이야기다. 안책임의 빛이 나는 모습에 남성 독자들은 <오피스 누나 이야기>를 읽으면서 두근거리는 설렘을 느낄 수 있다. 요즘 로맨스와 로맨스 판타지 웹툰이 넘쳐나지만 앞으로 이렇게 진정 어린 사랑 이야기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로맨스를 좋아하지 않는 필자같이 무덤덤한 독자까지도 빠져들 만큼 설렘과 안타까움이 배어나는 성숙한 어른들의 연애 이야기, <오피스 누나 이야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