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로맨스〉: 세계의 법칙으로부터 살아남기
로맨스는 언제나 가장 많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온 소재다. 작품의 중심서사가 로맨스가 아니더라도,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의 사랑은 으레 당연한 결과이자 행복의 증명으로서 자연스레 등장하곤 한다. 로맨스 장르의 기본적인 법칙은 단순하고도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다.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필연적으로 사랑에 빠져 시련 끝에 행복한 인생을 손에 넣는 것. 인물들의 모든 행동의 근원과 결과에는 반드시 사랑이 포함된다. 그래야만 로맨틱한 이야기가 될 수 있고, 모두가 그런 행복한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올해 2021년 1월부터 연재된 〈살아남은 로맨스〉 역시 제목에서부터 ‘로맨스’를 담아내고 있다. 여자주인공 ‘은채린’은 〈내일도 사랑해〉라는 소설의 주인공에게 ‘빙의’한 인물이다. 엑스트라들은 모두 검은 그림자로만 보이는 판타지적 세계 속에서 남자주인공 ‘유제하’와의 로맨스를 이루는 것이 그의 목표다. 언뜻 이러한 설정만 살펴보았을 때에는 판타지 요소와 로맨스 문법을 적절히 결합한, 무난하고 편안한 대중성이 이 작품의 강점처럼 예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살아남은 로맨스〉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그 평안이 깨어질 때 드러난다.
여느 로맨스 작품의 여자주인공들이 그렇듯이, 채린에게도 ‘남자주인공에게 고백받는 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로맨틱한 기다림처럼 보이지만 채린이 고백을 기다리는 것은 그저 달콤한 사랑에 대한 설렘 때문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정조차 알아볼 수 없는 검은 그림자로만 보이는 세계 속에서, 제하는 채린이 온전히 외양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자 구원자다. 그런 제하에게 사랑 고백을 받는 것은 단순히 연애를 시작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순리에 따라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증명하는 행위인 셈이다. 그러니 제하의 고백은 반드시 그 어떤 순간보다 로맨틱하고 완전무결하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제하가 채린에게 고백하는 날, 바로 그날이 채린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된다. 채린이 전혀 바라지 않았던 방향으로.
△ 〈살아남은 로맨스〉 1화
음악실에서 만나기로 했던 제하는 갑작스레 좀비가 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좀비에게 물린 채린은 다시 그날 아침으로 회귀한 채 침대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그 후부터 아무리 반복해도 이 좀비 사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며 죽음과 회귀를 반복하게 된다. ‘로맨스’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사태에 대해 채린은 “안돼. 거짓말이지? 넌 나를 행복하게 해 줄 ‘남주’잖아. (2화)”라고 외쳐보지만 가혹한 현실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이 거대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채린이 선택한 길은 어떻게든 제하를 구해내고 다시 두 사람의 ‘로맨스’를 회복하여 원래 장르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외의 길은 생각할 수도 없다. 남자주인공이, 제하가 없는 로맨스 소설 따위는 영원한 고독이고 불행일 게 분명하니까.
△ 〈살아남은 로맨스〉 6화
제하 이외의 엑스트라들은 채린에게 모두 시련의 요소이고 방해물일 뿐이다. 무슨 표정을 짓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괴물들. 하지만 채린이 제하의 목숨을 지켜내는 것을 거듭 실패하다가 마침내 289번째 삶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엑스트라 X’와 마주하며 채린의 이야기에 변화가 생겨난다. 남자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와 이야기를 나누며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자 비로소 “살아남은 로맨스”라는 로고에는 채린의 얼굴이 담긴 표지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제 채린이 주인공으로서 선택한 등장인물은 제하가 아닌 ‘엑스트라 X’이며, 채린은 스스로가 이 좀비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원자가 되기를 다짐한다.
△ 〈살아남은 로맨스〉 25화
채린이 제하가 아닌 다른 인물을 구하고자 결심한 때부터, 남자주인공을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열쇠로 여기지 않는 순간부터 ‘로맨스’라는 거대한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순리가 이제 채린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저주’로 받아들여진다.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의 필연적인 만남, 이유 없이 여자주인공을 사랑하는 서브 남자주인공, 그리고 여자주인공을 시기하며 따돌리는 여자 엑스트라들. 남자주인공은 그런 것들이 모두 운명적인 사랑의 일부라고 말하지만, 채린에게는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저주에 불과하다.
‘엑스트라 X’가 누구인지 찾아내는 과정 속에서 채린은 같은 반 학생들과 모두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점차 ‘엑스트라’가 아닌 ‘등장인물’이 되어간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깊이 알아갈수록 점차 그림자가 아닌 또렷한 외양을 보이게 된다. 소설 내에서 짧게 언급되었던 엑스트라들의 단점 역시 채린의 관심 어린 시선을 거치며 특별한 강점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함세은’은 소설 내에서 귀가 얇고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는 ‘민폐녀’에 불과했으나, 채린과 연대한 이후부터는 채린의 설득력을 전파해주는 역할을 해내는 강력한 지원자가 된다.
△ 〈살아남은 로맨스〉 47화
현재 작중에서 채린은 엑스트라들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알아냈지만, 여전히 로맨스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좀비들은 점점 더 괴악한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잃어버린 친구들은 돌아오지 못하며, 남자주인공의 사랑을 승낙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이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는 열쇠일 것이라는 믿음이 때때로 불쑥 솟아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린은 이제 〈내일도 사랑해〉의 ‘은채린’으로 연기하며 살아가는 것을 멈추겠다고 말한다. 로맨스의 장치로서 소모되지 않겠다고, 타인의 구원에 의탁하기 위해 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듯이.
과연 채린은, 아니 ‘주인공’은 어떻게 좀비들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타인에게 구원받고픈 욕망으로부터, 로맨스의 저주로부터 벗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작품을 감상하며 그 여정에 함께하는 것은 분명 외롭고 고단하겠지만, 분명 함께 용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