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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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라이온

-1-“ ‘제로’라니-? 너 이름 너무 웃긴다-. -그치만 딱 맞는 것 같아, 너한테는. 생각해 보면 그렇잖아? 집도 없지, 가족도 없지, 학교도 안 다니지, 친구도 없지. -이것 봐, 네가 있을 장소 같은 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잖아?”(주인공의 실제 이...

2015-10-05 최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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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로’라니-? 너 이름 너무 웃긴다-. -그치만 딱 맞는 것 같아, 너한테는. 생각해 보면 그렇잖아? 집도 없지, 가족도 없지, 학교도 안 다니지, 친구도 없지. -이것 봐, 네가 있을 장소 같은 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잖아?” (주인공의 실제 이름은 레이(零)로, 숫자 ‘0’을 뜻하기도 한다.) 

첫 번째 권, 첫 페이지, 첫 장면부터, 비웃는 표정의 여자 입에서 흘러나오는, 주인공을 향한 잔인한 말로 시작하는 우미노 치카의 신작 <3월의 라이온>은, "어떤 외로운 소년의 가슴 먹먹한 성장기"다. 전작인 <허니와 클로버>에서 미술대학을 무대로 청춘들의 사랑과 방황 그리고 극복의 과정을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시선으로 아름답게 풀어냈던 우미노 치카는, 이번엔 ‘장기회관’으로 이야기의 무대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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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야마 레이, 이것이 나의 이름. 큰 강가에 있는 조그만 동네에서 이제부터 나는 살아간다. C급 1조 5단 17세. 직업 프로 장기기사.”

<3월의 라이온>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일본 장기’를 소재로 삼아 스토리를 끌고 나간다. 남자 주인공인 키리야마 레이는 중학생 때 프로로 데뷔한 ‘천재 기사’로 설정되어 있는데, 결정적으로 필자는 ‘일본 장기’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라서, 작가가 매우 공들인 ‘대국 장면’이나 ‘승부의 순간’ 같은 부분에서 잘 이해가 안 되다 보니, 작품을 읽는 재미가 반감되는 것 같아 매우 씁쓸하다.(본 작품과 비슷한 소재로 만들어진 <고스트 바둑왕>의 경우에는 그나마 규칙이라도 좀 아는 바둑이 소재라 대국 장면이 나오면 어느 정도 이해는 됐는데, ‘일본 장기’는 아예 규칙도 모르니 좀 답답하다.)

그러나 일본 장기를 모른다 해도, 이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글의 서두에 미리 확실히 밝혀두고 간다. (<고스트 바둑왕>도 그렇지만, 똑같이 일본 장기를 소재로 만든 <81다이버> 같은 작품도 읽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은가?) 주인공인 레이의 직업이 프로 장기 기사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장기를 두는 장면이나 승부 이야기가 많이 나오긴 하지만, 이건 작품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주는 ‘작가가 고안한 하나의 장치’일 뿐이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3월의 라이온>은 ‘어떤 외로운 소년의 가슴 먹먹한 성장기’인 것이다. 본격적인 내기 장기꾼들의 이야기를 다룬 <81다이버>보다는 오히려 바둑을 소재로 삼아 주인공의 성장기를 그려낸 윤태호의 <미생>에 더 가까운 만화라고 할까?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프로가 되지 못한 연수생이었지만, 키리야마 레이는 중학생 때 프로가 된 ‘천재’라는 점이 좀 다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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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 바람이 세차게 부는 다리 위에서 품에 안은 도시락은, 마치 조그만 생물처럼 따스했다.”

<3월의 라이온>의 주인공 키리야마 레이는 장기 역사상 5번째로 중학생 때(15세) 입단하여 프로기사가 된 천재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실상, 레이는 교통사고로 부모와 여동생을 갑작스럽게 잃고 아버지의 친구인 프로 장기기사 코다에게 맡겨져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외로운 소년일 뿐이다. 정식으로 입적은 하지 않았지만, 양아버지이자 스승인 코다는 자신의 친자식들보다도 더 레이를 사랑해주려고 노력했고, 그로 인한 영향인지 타고난 재능인지는 몰라도 레이는 어린 시절부터 장기에 엄청난 실력을 보이며 결국 프로기사까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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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양부(養父)의 교육방식(친자식에겐 엄격하게, 레이에겐 다정하게)이 잘못되었던 탓일까? 레이는 코다의 자식들과 엄청난 반목과 갈등을 겪으며 계속 마음에 상처를 받다가, 결국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때 이른 독립’을 결심한다. 미성년자 신분이었지만, 프로기사라는 어엿한 직업과 안정적인 수입(사실 레이는 승률이 좋아서 경제적으로 꽤 여유가 있다)도 있고 해서 ‘물질적인 독립’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독립’만은 전혀 되질 않았다. 장기 이외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사람을 사귀는데도 무지하게 서툰, 소심하고 수줍은 성격에 말도 거의 없어서, 레이는 철저하게 고독한 환경 속에서 기보와 장기에만 매달린다. 생각한 바가 있어 남들보다 1년 늦게 편입한 고등학교에서 인연을 맺게 된, 자신의 팬이기도 한 장기애호가 담임선생 하야시다가 그나마 점심도 같이 먹고 얘기도 나누는 유일한 상대였다. 그래서 일까? 우미노 치카가 그려낸 작품 초반부 레이의 얼굴과 표정, 몸짓, 말투에서는 절절하게 외로움이 묻어난다.

강가의 아파트에서, 변변한 가구도 없이(심지어 커튼도 없다) 텅 빈 냉장고와 함께 살던 레이는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아카리와 알게 된다. 아카리는 아름답고 자상한 여자로 평상시에는 외할아버지가 운영하는 미카즈키 당이라는 전통과자점 일을 돕다가 가끔 아르바이트로 이모가 긴자에서 운영하는 바(Bar)에서 손님접대를 맡곤 하는데, 이곳이 마침 장기기사들의 단골 가게였다. 아카리는 선배들에게 끌려와 억지로 술을 먹고 만신창이가 된 레이를 세심하게 돌봐주다가 결국 집까지 데려와 간호해주게 된다.

아카리는 얼마 전 어머니를 잃고 외할아버지와 이모의 도움을 받아 여동생 둘을 돌보는 가장(家長)이기도 했다.(아버지는 가출) 바로 밑의 여동생인 히나는 중학생이고 막내 여???생 모모는 아직 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한 어??? 아이였지만, 아카리는 특유의 성실함과 자상함으로 동생들을 잘 돌보았고 매우 가정적이기까지 해서, 비록 세 자매와 할아버지, 고양이들이 사는 낡은 집이었지만 항상 밝고 따뜻한 분위기가 감도는 좋은 공간이었다. 

어린 시절 가족을 잃고, 오직 장기밖에 몰랐던 외로운 소년 레이는, 세 자매와 인연을 맺고 그들의 집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인간미를 갖춰나가게 된다. 또래의 아이들처럼 밝게 웃을 수 있게 되었으며 다른 사람들과도 진지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더 이상 외로워하지 않게 되었다. 레이가 자신이 사는 아파트를 나와 강 건너 아카리 자매의 집을 향해 다리를 건널 때 “이 동네로 이사 오고 얼마 동안은 어디를 걸어도 꿈속에 있는 듯했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거리가 흑백으로 깜박깜박거렸다. 하지만 나중에 깨달았다. 긴장했던 것이다. 낯선 거리에, 그리고 혼자만의 생활에. 그러나 아는 사람이 생긴 순간, 다리 건너편에 색깔이 입혀진 느낌이 들었다.”라는 독백이 흐르는데, 이는 정말 ‘변화해가는 레이’의 모습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명문(名文)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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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상은 어느 날 갑자기 찢겨나가듯 끝나 버렸다. 소풍 갔다 돌아오니 내 소중한 아빠와 엄마와 어린 여동생은 차갑고 딱딱하고 얼룩덜룩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시설이란 곳이 어떤 장소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학교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저녁이 되면 혼자 아늑한 내 방에서, 마음 놓고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시설에 들어가면, 돌아가도 쭈욱 누군가가 있고... 잠잘 때도 누군가가 있고... 이제 ‘마음 놓을 수 있는 시간’은 365일 중에서, 한시도 없어진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찾아왔다. 장례식에는 핏줄을 나눈 친척들이 많이 모여 있었지만, 그때 방에 들어온 그 사람만이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반가웠다. <너는, 장기가 좋니?>, <네>.... 거짓말이었다... 내 인생 최초의 살기 위한. 그리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이것이 계약의 순간이었다. 장기의 신과 나의, 추한 거짓말로 싸인 계약. 그렇게 해서 막은, 인정사정없이 열려 버리고, 나는 프로기사 가정의 아이가 되었다.” 

우미노 치카의 그림은 예쁘고 깜직하다.(어떤 때는 앙증맞기까지 하다.) 귀엽고 팬시(fancy)한 동화적인 느낌이랄까? 그러나 그녀가 담아내는 이야기나 작품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어른스럽고, 서정적이며, 문학적이다.(아주 가끔, 어둡고 냉정한 느낌도 풍긴다) 자신의 그림과 강렬하게 대비되는 묵직한 느낌의 이야기인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하나 같이 모두 상처를 안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누구나 각자의 상처 하나쯤은 있는 법이지만, 우미노 치카가 자신의 캐릭터를 통해 표현해내는 ‘내면의 상처’는 상처의 경중과 상관없이 읽는 이의 가슴을 강하게 울린다. 팬시하고 동화적인 느낌의 그림으로 표현해내는, 어둡고 외롭고 가슴 아픈 사람들의 세계, 이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의 요소가 아름답고 인상 깊게 결합되어 있는 것은 우미노 치카의 천재적인 연출력과 독자들과의 공감능력, 그리고 ??장 중요한 ‘세계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때문이다. 우미노 치카의 작품에서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심지어는 사물과 풍경까지도 따뜻하고 편안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그것을 그렇게 그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아주 적절한 대사와 독백’으로 독자에게 납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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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라이온>에서 우미노 치카의 이 독특한 감수성은 그야말로 경지에 이른 듯, 아름답고 평온한 빛을 매 권, 매 챕터마다 발산한다. 레이가 상처를 받아 ‘자신의 동굴’ 안으로 또 다시 도망치려 할 때도, 왕따를 당하는 친구를 도와줬다는 이유로 더 가혹한 왕따의 피해자가 되어 버리는 히나가 강가에서 서럽게 울고 있을 때도, 할아버지가 쓰러져 모든 이들의 불안이 엄청나게 커졌을 때도, 읽는 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를지 몰라도 마음만큼은 무척 안심이 된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쳐도, 누군가와의 진실한 교류만 있다면 사람은 다시금 힘을 내어 일어날 수 있다는 인생의 진리를 우미노 치카가 ‘따뜻한 시선’으로 작품 속에서 ??현해 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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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러니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 세로 9칸, 가로 9칸, 총 81칸의 장기판 위에서, 양쪽이 8종류, 20개씩의 말을 가지고, 말을 서로 뺏거나 빼앗기거나 하면서, 상대의 ‘왕’을 잡는 게임이야. 먼저 두는 사람을 ‘선수(先手)’, 나중에 두는 사람을 ‘후수(後手)’라고 하고, 교대로 한 번씩 두어 나가지. 8종류의 말은 각각 성격도 다르고 움직이는 범위도 달라.”

<3월의 라이온>에서 다른 만화와는 차별된,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장기’와 프로기사들이 대국 장면에서 펼치는 치열한 승부의 순간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두는 장기와는 규칙도 모양새도 너무 달라서 장기해설이나 묘수풀이 같은 것은 아무리 봐도 이해조차 되지 않지만, 우미노 치카의 탁월한 연출력으로 표현해 내는 ‘승부의 순간’만큼은 장기의 문외한이라도 그 순간의 긴장감과 떨림, 그리고 감동을 맛볼 수 있다.(문외한도 느낄 수 있는 승부의 묘미를 이렇게 탁월하게 만화로 표현한 것이 우미노 치카의 진짜 대단한 점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주인공인 키리야마 레이를 중심으로 마치 가지가 뻗어나가듯이 다양한 캐릭터들이 계속 등장하면서 스토리의 구성을 풍부하게 해주는데, 메인이 되는 스토리는 ‘레이의 성장기’이지만, 장기라는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프로기사로 설정되어 있어서, 마치 소년만화의 대결장면처럼 연출된 대국 장면을 보는 재미가 엄청나게 쏠쏠하다. 그리고 우미노 치카의 가장 큰 장점인 ‘어떤 캐릭터도 허투루 다루지 않는다.’는 창작원칙이 <3월의 라이온>에서는 더욱 더 빛을 발하고 있어서 매 권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매력적인 캐릭터(특히 프로기사들)를 대하는 재미가 아주 흐뭇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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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3월의 라이온>은 ‘레이의 성장기’에 가장 큰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레이는 아주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고, 그로 인해 마음을 닫고 장기에만 열중해 이른 나이에 자립을 이루었지만, 마음의 결핍은 또래의 다른 누구보다도 무척 심했다. 그랬던 레이가 세 자매를 만나며 서서히 따뜻해지고, 그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도 교류를 시작하며, 좋은 라이벌, 좋은 친구, 좋은 선후배, 좋은 스승을 만나 자신과 진정으로 마주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레이가 프로의 세계에서 진검승부를 펼치며 치열한 생(生)의 본질을 깨달아가고 천천히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이야기, 그것이 <3월의 라이온>의 핵심이다.

현재(2015.08.) 한국어판으로는 10권까지 나와 있다. ?? 한 가지, 정말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다음 권이 너무 천천히 나온다는 것(거의 1년에 한 권 꼴로 나오는 것 같다)이다. 여름도 저물어가는 지금, 정취 있는 가을날에 읽기 딱 좋은 작품이다. 재미와 감동이 독특한 감수성으로 정말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는 만화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