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웹툰이 일상툰이나 개그툰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시니(글), 혀노(그림) 작가는 웹툰 <죽음에 관하여>를 통해 탄탄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무겁고 불편한 주제를 들이미는 뚝심을 선보였다. 과거 공익근무요원으로 군 생활을 할 당시 119 소방관과 구급차를 타는 일을 했던 시니 작가는 군 생활 동안 죽은 사람을 많이 봤고, 그 과정에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그렇게 탄생한 <죽음에 관하여>는 매우 철학적이며 한 번 읽고 곱씹어봐야 할 문제들이 많은 웹툰이다. 매회 등장하는 인물들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마주하게 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죽음이라는 것이 먼 곳에 존재하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삶과 바로 맞닿아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연재된 <죽음에 관하여>는 매 회 마지막 반전을 통해 긴 여운을 남기며 작품을 계속 보게 만드는 힘을 쌓았다. 자신이 남기고 온 자식들의 고통을 간접 체험한다든지, 마지막 친구가 올 때까지 저승에서 기다렸다가 함께 사진을 찍는 늙은 친구들의 진한 우정 등 <죽음에 관하여>는 결국 죽음을 통해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묵직한 웹툰이다.
옴니버스가 아닌 스토리 웹툰이라는 점만 달라졌을 뿐, 시니-혀노 작가의 차기작 <네가 없는 세상>도 인간을 심도 있게 탐구하는 웹툰이다. 어디서 어떻게 발생했는지 모르는 의문의 바이러스가 인간의 뇌에 침투해 ‘너’라는 단어를 삭제한다. 단순히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주제로 한 웹툰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네가 없는 세상>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광경을 비춘다.
가진 것이라곤 허세밖에 없지만 자신이 짝사랑하는 여학생 연서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창익, 학생회장인 동시에 학교 싸움 짱인 철수 등 <네가 없는 세상>은 특별할 것 없는 한 고등학교 교실의 풍경으로 시작한다. 조용히 학교 다니는 줄 알았던 ‘오타쿠’이자 ‘왕따’인 학생이 수업 도중 도망가다가 선생님한테 걸렸을 때 “왜 나한테 지랄들이야?”라고 대들어도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동안 억눌려왔던 감정이 폭발한 것이겠거니 생각하며 웃어넘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날이 우리가 걱정 없이 웃을 수 있던 마지막 날이었다”는 예고 메시지가 등장하는 순간, <네가 없는 세상>은 본격적인 스토리를 꺼내놓는다. 갑자기 한 회사의 신입사원이 “도대체 왜 일하는지 모르겠다”는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고, 인터넷에는 “소리 지르고 싶어서” 갑자기 소리 지른 학생의 일화가 떠돌아다닌다. 그리고 개인의 ‘일탈’처럼 보였던 이 행동들은 마치 전염병처럼 퍼져나간다.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조심하란 얘기도 이상하지만 아무튼 조심하라”는 알 수 없는 경고를 한 지 며칠 후, 전국 학교들이 휴교령을 내린다. 평범한 일상을 보여준 뒤 갑자기 어떤 불길한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세상 전체가 바뀌는 현실, 그 안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배우는 섬뜩한 깨달음. 이처럼 <네가 없는 세상>의 전개는 전작 <죽음에 관하여>와 유사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 그래서 다음 회를 계속 볼 수밖에 없는 힘. 그것이 시니-혀노 작가의 내공인 것이다.
창익과 친구들은 ‘괴기 바이러스, 전 세계 비상’이라는 헤드라인이 뜬 뉴스 속보를 본다. 외관상 차별화된 증세는 없으나 전염속도는 굉장히 빠른, 한 마디로 아무도 모르게 빠르게 퍼져나가는 위험한 바이러스다. 3개월 전 떨어진 운석에서 발견된 바이러스 세포들은 사람의 뇌에 침입한다. 사람이 알고 있는 개념 하나를 완전히 지워버리는데, 아직 어떤 원리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바이러스가 우리의 사전에서 지워버리는 단어는 ‘너’다. 단어 하나의 삭제가 몰고 올 파장은 얼마나 큰 것일까. 실체 없는 바이러스를 알리는 뉴스 속보와 함께 “네가 없는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말로 끝난 6화는 거대한 서사시의 서문처럼 웅장해보이기까지 했다.
누구나 예상했겠지만, 첫 번째 겉으로 드러난 현상은 폭력이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 이타심이 없는 사람들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누구를 때리고 죽이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네’가 없다는 것은 죄책감, 의무, 이타심 등 모든 감정과 의욕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무조건적인 내리 사랑을 쏟는 부모도 예외는 아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외출했던 창익의 부모님은 결국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돌아온다. 어렵게 식량을 구해 온 부모님들은 자식이 아닌 자신만이 남아있는 세상에서 허겁지겁 식량을 먹기 바쁘다.
폭력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 폭력을 통제할 경찰 인력도 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과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사람이 불의의 상황에 빠진 것을 보고 목숨 걸고 뛰어들 사명감이 없다는 뜻이다. <네가 없는 세상>은 단순히 이기적인 인간들이 판치는 세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너’라는 단어가 없어짐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연쇄작용을 촘촘하게 그려내고 있다. 배려심이 없어지고 폭력이 난무하고 그 폭력을 통제할 경찰 인력의 사명감도 없어진다. 부모의 내리사랑도 무용지물이 되고, 이로 인해 가정이 무너지며, 그 가정들이 모인 사회도 붕괴되는 것이다. 그저 ‘너’라는 단어 하나가 없어졌을 뿐인데 말이다.
<네가 없는 세상>을 무너지게 만든 것은 인간 세상에 침투한 인위적인 바이러스 때문이다. 외부적 요인이 없었다면, 그들이 사는 세상은 별 문제 없는 것처럼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진짜 세상은 외부에서 침입한 의문의 바이러스가 아니더라도, 이미 ‘네가 없는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고려대 재학생이 개인적으로 붙인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가 대학가를 거쳐 고등학교, 국회 등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20대를 꼬집는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는 결국 네가 없는 세상, 오로지 나의 공부, 나의 취업만이 유일한 관심사가 된 세상을 지적한다. 굳이 원인 모를 바이러스가 뇌에 침입해 ‘너’라는 개념을 없애지 않아도 지금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세상은 충분히 ‘네가 없는 세상’으로 변질되고 있다.
<네가 없는 세상>은 바이러스의 근원지가 외계인지, 누가 노린 것인지 혹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지 모른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외부의 침입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만든 바이러스일지도 모른다. 이 미친 세상에서 근근이 버티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 바이러스 말이다.
그래서 웹툰 <네가 없는 세상>은 진짜 ‘네가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향한 마지막 경고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너’라는 단어가 없어진다는 것의 심각성을 깨달은 극 중 고등학생들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음에도 자신이 살기 위해 바이러스 감염된 친구의 죽음을 방치했다. 죽은 친구를 애도하기 전에 친구가 뛰어내린 창문을 막자는 생각부터 한다. 일단 나라도 살아야 하니까.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고도 ‘네가 없는 세상’은 충분히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네가 없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이미 ‘네가 없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네가 없는 세상>이 감염자의 폭력성보다, 비감염자의 불안에서 기인된 폭력성에 집중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바깥에서 감염자들이 사회를 얼마나 무너뜨리는지 보다 집안에 갇혀있는 비감염자들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이기적으로 변하는지를 조명한다.
그래서 현재 <네가 없는 세상>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캐릭터는 창익이다. 창익은 ???모님의 바이러스 감염을 확인하고 밖에서 5일간 떠돌다가 친구들이 있는 공간으로 들어왔다. 그는 정말 친구들의 안위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비감염자일까, 자신만 살아남기 위해 배려하는 척 위장하고 있는 감염자일까. 그리고 바이러스가 침투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는 ‘나’일까, ‘너’일까 아니면 ‘우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