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 : 더 뉴 프런티어
전쟁은 끝났다. 평화는 도래한 듯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권력을 위한 암투, 끊이지 않는 여성차별과 인종차별 문제, 동서 양진영의 핵무기 경쟁, 우주 경쟁, 옳은 것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던 예전과 달리 법에 걸리지 않을 방법만 생각하며 나아가는 시대. 그...
2014-01-22
이규원
전쟁은 끝났다. 평화는 도래한 듯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권력을 위한 암투, 끊이지 않는 여성차별과 인종차별 문제, 동서 양진영의 핵무기 경쟁, 우주 경쟁, 옳은 것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던 예전과 달리 법에 걸리지 않을 방법만 생각하며 나아가는 시대. 그 시대를 향해서 히어로들은 묻는다. 여전히 ‘자유와 정의와 미국적인 방식’을 추구하는 히어로들의 옳은 마음이 유효하지 않습니까? 라고. 그에 대한 대답은 ‘유효하다’이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외계인과 거대괴물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싸움이 아니라 지구와 인류에 대한 가장 거대한 위협인 인류 자신에 대한 싸움이기 때문에 인류가 존재하는 한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뉴 프런티어>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존 F 케네디가 뉴 프런티어를 부르짖던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그 시대에 슈퍼히어로들이 실존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참으로 실감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마치 브루스 팀의 배트맨 애니메이션이 떠오르는 브루스팀의 부드러고 차분한 그림체는 결코 지난 시대를 웅장한 대하드라마처럼 과장하지 않는 대신 잔잔하고 소박한 일기장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렇기에 영웅들이 벌이는 싸움과 화려한 액션에 시선을 뺏기며 자신도 모르게 읽는 속도가 빨라져 휙휙 넘어가지 않고, 그들의 눈빛과 손짓과 발짓 하나에 차근차근 시선을 옮겨가게 된다. 좋은 음식을 급하지 않게 먹으며 천천히 음미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요리사의 재능인 것처럼 다윈 쿡 도한 그런 마술 같은 재주로 눈을 붙든다. 그렇지만 <뉴 프런티어>가 매력적인 그래픽 노블이라는 것은 이 책이 격동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도, 다윈쿡의 그림이 너무나 좋아서도 아니다. <뉴 프런티어>는 당시의 정치 사회적 변천사 이전에 전후 격동의 변천기를 겪었던 미국 만화 역사의 주요 순간들을 마치 모자이크처럼 그 중요 장면들을 떼고 떼어 이어 붙인 작품이다. 한 조각 한 조각 소중히 떼어내고 그것을 다시 붙일 자리를 수십번도 더 고민하다가 조심조심 제자리를 찾아 이어붙인 작가의 애정이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깊게 배여 있는 작품. 그것은 <뉴 프런티어>를 조급하게 읽어치울 수 없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1950년대에 DC에는 <브레이브 앤 볼드>라고 하는 만화가 있었다. 요즘은 배트맨과 다른 DC 히어로들이 매 호마다 팀을 바꾸는 만화로 알려져 있는데, 1959년 전 초창기만 하더라도 이 만화는 제목 그대로 용감한 자와 대담한 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만화로서 바이킹 왕자와 중세 기사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23호와 24호의 내용을 보면 이렇다. 바이킹 왕자는 드래곤 킹을 무찌르고 그에 대한 상으로 왕으로부터 공주와의 결혼을 허락받는다. 그런데 이를 질투한 이웃나라의 왕은 그것을 완성하면 공주의 영혼을 가둘 수 있는 조각상을 제작한다. 그리고 결혼식 순간에 조각상이 완성되며 공주는 사라진다. 그런데 이 바보 같은 나쁜 왕은 공주의 조각상을 자기 배의 뱃머리에 달고 항해를 하다가 바다에 빠뜨리고 만다. 공주를 찾아나선 바이킹 왕자는 그물을 던져 조각상을 건져올리는 데는 성공하지만 망망대해서 바다괴물을 만나 한참을 표류하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져 고향으로 돌아온다. 실은 이 내용은 <뉴 프런티어 1권> 후반부에 등장하는 바이킹 왕자에 관한 전설을 그린 2페이지의 원전이다. 다윈 쿡이 약간 각색을 하긴 했지만 선수상과 함께 바다를 떠돌다가 괴물을 물리치는 왕자의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같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선수상이 아니라 괴물을 물리친다는 부분이다. 이것은 50년대 말에서 60년대로 넘어가는 당시 DC 코믹스의 만화들의 커버들만 주욱 훑어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히어로들과 상대하는 주요 악당들이 잔인한 살인범과 범죄자들과 슈퍼악당들에서 공룡과 바다괴물과 거대괴수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히어로들이 상대해야 하는 적이 바뀐 것은 전쟁이 끝났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1954년에 프레드릭 웨덤 박사가 만화가 유해하다고 주장하면서 주도한 만화 내용에 대한 대대적인 마녀사냥의 영향도 있었다. 당시 웨덤 박사는 배트맨고 로빈을 동성애자로 모는 등 집요하게 꼬투리를 잡으며 만화를 검열케 했고, 그 결과 이 시기에 출판된 만화들은 검열 딱지인 CCA 인지를 붙이고 있다. 그 결과 드라큘라, 늑대인간 등 초자연적이며 인간에게 혐오감과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나 잔혹한 범죄자 등은 만화에 등장하기 힘이 들었고, 결국은 가장 만만한 괴수인 공룡이 대표적인 적이 되었다. 물론 당시 우주 경쟁이 벌어지고 과학시대가 열리면서 공룡이 인기 있었던 것도 나름의 영향이 있었다. 그런 사연으로 공룡과 바다괴물을 잡아야 하는 주인공은 바이킹보다는 조금 더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인물로 바뀌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2차 세계대전과 한국 전쟁 등 전쟁에서 활약했던 군인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다시 정부의 부름을 받고 새로운 팀을 결성하여 예전 그들이 애용하던 전투기를 타고 일본군의 거대한 전함과 중공군의 탱크 대신 거대한 공룡을 잡으러 다니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일명 자살 특공대(수사이드 스쿼드)라고 불리는 태스크 포스 엑스의 전사들이다. <브레이브 앤 볼드> 25,26,27호가 바로 이 수사이드 스쿼드의 멤버인 플랙 대령과 그의 아내 카린 등이 데뷔하여 활약을 펼친 이슈들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전의 바이킹과 마찬가지로 괴물과 싸우는 것은 동일한데, 이들 자살 특공대가 예전 전쟁에서 겪은 비참한 상실의 기억, 잃어버린 동료에 대한 이야기가 괴물과의 전투들만큼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은연중에 과연 그들이 왜 이런 싸움을 이어가야 하는지, 그들이 싸워야할 진정한 괴물은 누구인지 등 조금 더 깊은 이야기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플랙 대령은 <뉴 프런티어> 처음 공룡의 섬에 갇힌 군인 중의 하나로 등장하여 이야기의 끝까지 중심축 역할을 하는데, 맨 첫 챕터, 공룡의 섬에서 표류하는 루저스의 멤버 클라우드가 구출해내는 인물이 바로 그다. 괴물의 섬에서 생환한 군인. 괴물의 바다를 해치고 돌아온 바이킹의 전설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 이야기에서 플랙을 구출한 클라우드는 나바호 인디언 출신의 비행사로 원전(1960년 올 아메리칸 맨 오브 워 82호)에 보면 그는 최초의 편대장으로서 ‘플라잉 치프’ (하늘을 나는 추장)이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이다. <뉴 프런티어>에 등장하는 화성 탐사선의 이름이 하늘 구름인 것도 이 별명에서 연유한다. 군인들 중에서도 특별히 전투기 조종사들이 인기 있었던 것도 재미있는 점이다. 그래서 <뉴 프런티어>에서 공군 조종사로서 한국전쟁의 공중 전장에서 실전을 겪고 전쟁의 악몽에 시달리는 할 조던의 이야기를 꺼낸 점은 실버에이지 시대에 바이킹 전사에서 군인과 전투기 조종사,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늘을 나는 슈퍼히어로로 넘어가는 주인공의 변천사를 참 자연스럽게 녹여낸 시도라는 생각이 든다. <브레이브 앤 볼드>와 함께 DC 실버에이지의 개막에 기여한 또 하나의 만화책은 <쇼케이스>다. <쇼케이스 4호>에선 플래시가 데뷔했고, 6호와 7호에서는 모험가 <챌린저스 오브 디 언노운>이 그리고 8호에서는 플래시의 숙적 중 한나인 캡틴 콜드가 등장했다. 9호는 로이스 레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슈퍼맨의 여자친구 로이스레인이라는 새로운 시리즈를 열었고, 쇼케이스 17호에 우주 모험가인 아담 스트레인지가 등장했다. 17호의 출판 년도가 1958년 12월이니, 이미 <브레이브 앤 볼드>에서 바이킹의 이야기가 끝나고 수사이드 스쿼드와 저스티스 리그의 이야기로 넘어가기 1년 전에 실버에이지 히어로의 기본 토대에 대한 모든 실험이 <쇼케이스>를 통해 이뤄지고 있던 셈이었다. <뉴 프런티어> 이야기 속에서 슈퍼맨에 대한 기자로서 로이스 레인의 애정이 묻어나고 있는 것은 슈퍼맨의 여자 친구가 되고 싶은 로이스 레인의 꿈으로 가득 채워졌던 <슈퍼맨의 여자친구 로이스 레인> 시리즈의 로이스를 그대로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뉴 프런티어 2권>의 마지막 장면은 슈퍼맨과 배트맨이 빠지고 마샨 맨헌터, 아쿠아맨, 그린랜턴, 플래시, 원더우먼의 5인으로 구성된 저스티스 리그가 스타로라고 하는 거대한 불가사리 괴물을 잡는 장면이다. 이것은 역시 <브레이브 앤 볼드> 28호의 내용이다. 수사이드 스쿼드 이후 저스티스 리그가 괴물과 외계인들, 그리고 되돌아온 슈퍼악당들과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하는 그들 자신 슈퍼히어로들로부터 지구를 지켜나가는 이야기는 바로 이 장면이 그 시작점이 되었다. <뉴 프런티어>를 만화의 실버에이지와 그 영웅들을 현실의 역사속에 녹여낸 걸작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바로 이처럼 누군가는 그냥 그랬구나 하고 넘어갔을 만화 속 주인공과 악당들의 변천사의 간극과 이야기되지 않은 세계관의 부분들을 포착하여 전혀 새롭거나 낯설지 않게 아련한 추억의 빛깔 그대로 은근하게 녹여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만화는 슈퍼히어로 만화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도 시대상에 대한 익숙함과 만화영화적 그림체에 대한 익숙함으로 쉽게 즐길수 있는, 그러면서도 미국만화 매니아들에게는 한 올드팬의 열정과 애정에 감탄하며 더 깊은 세계를 즐기고 더 많은 이야기거리를 즐길 수 있는 독특한 만화라고 하겠다. 국내에서는 앱솔루트 에디션이 아니라 두 권의 트레이드 페이퍼백으로만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 약간 아쉽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