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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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국의 라스푸틴

“괴승 라스푸틴. 본명, 그리고리 이피모비치 라스푸틴(Grigorii Efimovich Rasputin). 러시아 시베리아 출신인 예언자, 민간요법 의사, 교주. 20세기 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의료 활동과 기도로 많은 사람들을 구하여 이름을 날렸다. 이윽고 혈우병에...

2014-01-15 김현우
“괴승 라스푸틴. 본명, 그리고리 이피모비치 라스푸틴(Grigorii Efimovich Rasputin). 러시아 시베리아 출신인 예언자, 민간요법 의사, 교주. 20세기 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의료 활동과 기도로 많은 사람들을 구하여 이름을 날렸다. 이윽고 혈우병에 걸린 황태자를 치료하려던 러시아 황제 부부의 초청으로 궁정에 들어와 절대적인 권력을 누린다. 천리안 능력이나 예언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공포를 샀지만 방탕한 여성 편력이며 사치스런 생활,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 등으로 황제의 측근은 물론 대중들도 결국 눈을 돌려 1916년에 암살당했다. 많은 러시아인들은 말한다. 라스푸틴은 역사상 최악의 인물이자, 나라를 무너뜨린 매국노라고...” - 1권 5~7p 내용 中에서 발췌 “<우국의 라스푸틴>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니 거의 실화다. 원작자인 사토 마사루는 외무성의 러시아 전문가였고, 2002년 체포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뒤 공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자신이 체포된 정치적 배경과 부도덕한 검찰과 언론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국가의 덫>을 비롯해 <자멸하는 제국> <공리주의자의 독서 기술> 등을 저술하며 일본의 대표적 논객이 된다. <우국의 라스푸틴>은 사토 마사루의 논쟁적인 원작을, 우라사와 나오키와 함께 <몬스터> <20세기 소년> 등을 만든 스토리작가 나가사키 다카시가 쓰고, <토미에> <소용돌이>의 만화가 이토 준지가 그린 작품이다. 러시아와 일본을 오가며 권력의 내막을 마구 파헤치는 선정적인 소재, ‘국책수사’를 둘러싸고 검사와 용의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드라마틱한 투쟁, 인간의 바닥을 알 수 없는 내면은 물론 기괴한 상상력까지 끈적하게 묘사하는 그림까지 <우국의 라스푸틴>은 모든 지점이 흥미롭다.” - 김봉석, “천하 매국노의 국익 타령”(한겨레21, 2012.09.07.)中에서 발췌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을지 몰라도 가만히 그 속을 관찰해보면, 일본과 독도를 놓고 영토분쟁 중인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킬만한 일본만화 한 편이 시공사를 통해 정식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어 전 6권으로 완결되었다. 제목은 “우국의 라스푸틴”, 위에 김봉석의 칼럼 중에 발췌한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을 만든 작가진의 위용은 매우 화려하다. “공포만화의 대가”로서 우리나라에도 두터운 팬 층을 보유하고 있는 이토 준지의 작화에, 우라사와 나오키와 “몬스터”, “20세기 소년” 등의 히트작을 작업한 스토리 작가 나가사키 다카시의 스토리라니...작가진의 명성만 놓고 본다면, 만화애호가라면 꼭 사서 읽어봐야 할 것 같은 그런 의무감이 드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이 작품이 “국가의 덫”이라는, 일본의 대표적인 논객 중 하나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토 마사루의 책을 원작으로 삼아 만화로 각색한 것이라는데 있다. “유우키 마모루”라는 이름으로 본편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는, 이 작품의 원작자 사토 마모루는, “우국의 라스푸틴”에서 다루고 있는 검찰의 “국책수사”에 엮여 500여일에 가까운 구속기간 동안 검찰의 보석 석방 제의 거래를 뿌리치고 무죄를 주장하며 홀로 맞섰던 전직 외교관이며, 후에 열린 공판에서 징역 2년 6개월, 집행 유예 4년 형을 선고받고 풀려난 인물이다. 사토 마사루는 1심 최후 변론에서 “외무성 문서가 공개되는 26년 후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며 굽힘없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으며, 석방된 후엔 자신이 이 사건을 통해 겪은 모든 일들을 “국가의 덫”이라는 책으로 펴내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하였다. (<국가의 덫>은 사토가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나서 체포 사건의 배경과 내막을 폭로한 수기로, 제59회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특별상을 받았으며 판매 면에서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그는 일본의 국익을 대변하는 논객으로서 일본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여기에 소개하는 만화 “우국의 라스푸틴”은 바로 이 사토 마모루의 논쟁적인 책, “국가의 덫”을 만화로 각색한 것으로 등장인물의 이름과 직책을 다소 바꾸었을 뿐, 원작을 거의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우국의 라스푸틴”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외교적 문제는, 종전 후 일본이 러시아에 대해 계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북방영토 반환에 관한 문제”이다. ‘북방영토’란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에 인접해있는 4개의 섬(하보마이 군도, 시코탄, 쿠나시리, 에토로후 : 합쳐서 ‘쿠릴열도’라고도 한다)을 말하는 것이며, 1945년 패전 이후로 현재까지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는 섬들이다. 일본은 이들 북방영토를 러시아가 국제 법을 무시한 채 불법으로 점거 중이라고 주장하며, ‘일본의 비원’이라고까지 표현하면서 반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우국의 라스푸틴”이라는 작품의 제목은, 바로 이 “북방영토 반환”을 목적으로 러시아와 외교적 접촉을 하며 협상의 틀을 마련하던 정치가 스즈키 무네오(만화에서는 츠즈키 미네오)와 그의 실무 파트너였던 외교관 사토 마모루(만화에서는 주인공 유우키 마모루)가 2002년에 실제로 일어난 ‘무네오 하우스 스캔들’을 계기로 언론에 의해 “스즈키 무네오는 ‘일본의 거악(巨惡)’, 사토 마모루는 ‘일본의 라스푸틴’이다.”라고 불리게 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원작 자체가 러시아를 상대로 한 일본 외교의 음습한 치부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고,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검찰을 동원, ‘국책 수사’라는 표적 수사 방식으로 정적(政敵)을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권력의 뒷모습이 그 실체를 드러낸다. 또 어떻게든 유죄를 만들어내려는 검찰의 ‘억지 기획수사’와 언론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국민의 공분을 일으키는 스캔들을 일으켜 사회 여론을 환기시키려는 기득권의 추악한 모습도 담아내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철저하게 성인들을 위한 만화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스토리는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 왜곡된 시스템을 웬만큼 경험해보지 않으면 공감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 만화는 ‘세상의 쓴맛’을 어느 정도 경험해본 어른들에게 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총 여섯 권에 걸쳐서, 권력의 사주를 받은 언론과 검찰에 의해 국가의 공적(公敵)으로 낙인찍힌 “일본의 라스푸틴” 유우키 마모루의 ‘결백 입증 절차’를, 작화가인 이토 준지와 스토리 작가인 나가사키 다카시는 500여 일의 수감기간동안 벌어진 검찰의 조사와 설득, 사건에 얽힌 뒷얘기와 외교의 속사정, 재판의 모든 과정까지 만화의 특성과 장점을 살려 상세하게 기술함으로써, 대중에게 “사건의 진실”을 가감 없이 폭로하였다. 국가권력에 의해 어처구니없이 희생되는 개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에 대항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투쟁을 시작하는 한 남자의 외로운 싸움을 ‘일본과 러시아의 외교’라는 거대한 틀에 엮어서 ‘본격 성인만화’로 만들어낸 “우국의 라스푸틴”, 이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국가권력이 개인을 상대로 자행하는 부조리한 일들’이 요즘 한국에서도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한 사람의 국민이자 힘없는 개인으로서 참으로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어른이라면, 한번쯤 정독해볼 필요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