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자는 두 사람 함께 사는 두 사람
“동거 8년...완전 부부잖아요!! 남편과 아내!! 그런데 왜 결혼 안 하세요?!” “이쯤 되니까 이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같아서, 어차피 종이 한 장 차이잖아.” 1992년에 발표된 015B의 노래 중에서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란 곡이 있다. 한 때 대...
2014-01-02
석재정
“동거 8년...완전 부부잖아요!! 남편과 아내!! 그런데 왜 결혼 안 하세요?!” “이쯤 되니까 이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같아서, 어차피 종이 한 장 차이잖아.” 1992년에 발표된 015B의 노래 중에서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란 곡이 있다. 한 때 대한민국 전역에 울려 퍼졌을 정도로 꽤나 히트를 친 노래인데, 그 가사는 대충 이렇다.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 가끔씩은 사랑한단 말로 서로에게 위로하겠지만 그런 것도 예전에 가졌던 두근거림은 아니야....(중략)...주말이 되면 습관적으로 약속을 하고 서로를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을 하지. 가끔씩은 서로의 눈 피해 다른 사람 만나기도 하고 자연스레 이별할 핑계를 찾으려 할 때도 있지.” 자신의 곁에 오래된 연인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만한 내용의 가사였기에 이 노래가 그토록 큰 인기를 끌 수 있었을 것이다. 사귄지도 아주 오래되었고, 서로에 대해 더 이상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도 없지만, 딱히 헤어질 이유도 못 찾겠고, 그렇다고 정식으로 결혼한 부부도 아닌, 그런 미묘하고 애매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사이...여기에 소개하는 일본 만화 “먹고 자는 두 사람 함께 사는 두 사람”이 바로 이런 “아주 오래된 연인”에 관해 리얼한 시선으로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작품이다. “아무리 오래 같이 살아도 왜 화를 내는지 모를 때가 있다.” 작품의 주인공인 리츠코와 슈이치는 고3 겨울에 교제를 시작해서 스무 살부터 동거를 시작, 사귄지는 10년, 같이 산지는 8년째인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다. 1권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연인 이상 부부 미만”이라는 제목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둘은 형식적으로는 부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감정상으로는 연인도 아닌, 정말 미묘하고 애매한 사이의 “동거인”이라고 할 수 있다. 리츠코와 슈이치는 서로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때는 아무 관계없는 제 3자보다도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다는 걸 깨닫고 놀라기도 한다. 리츠코와 슈이치는 서로에 대해 더 이상 가슴이 두근거리지도 않고, ‘아기는 갖고 싶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다고 간절하게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리츠코와 슈이치는 서로 헤어질 생각이 전혀 없다. 아니, 헤어진다는 상상조차도 하기 싫어한다. 이렇게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관계”를 8년째 이어가는 둘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작가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하고 둘의 삶에 현미경을 들이대듯이 디테일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어라? 왠지...오랫동안 같이 살다보니 안심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우리 두 사람 서서히 엇갈리고 있는 걸까?” “아주 오래된 연인들”에 관해 다룬 만화는 이전에도 많았고 요즘에도 무척 많다. 하지만 이 작품이 같은 소재를 다룬 다른 작품들에 비해 ‘독특하다’고 느끼게 된 것은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먹고 자는 두 사람 함께 자는 두 사람”은 하나의 에피소드를 두 개로 나누어 진행시켜 가는데 한 편은 리츠코의 입장과 시선에서, 또 한 편은 슈이치의 입장과 시선에서 풀어낸다. 그러니까 한 가지 사건을 가지고 두 개의 에피소드가 동시에 진행되는 다소 특별한 방식을 쓰고 있는 것이다. 1권에서는 총 다섯 개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는데 마지막 5화인 “이쿠타 씨의 경우”는 살짝 외전 같은 느낌이 강하니까 본편에서 제외하고, 제 1화 “연인 이상 부부 미만” 리츠코 편, 슈이치 편, 제 2화 “리츠코, 미팅에 나가다.” 슈이치 편, 리츠코 편, 제 3화 “고향집에 다녀올게” 리츠코 편, 슈이치 편, 제 4화 “열한 번째 생일” 리츠코 편, 슈이치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한 가지 사건을 가지고 각각의 입장에서 풀어나가는 시간적 동시성을 가진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같은 사건을 다루는 두 개의 에피소드가 만나 짝을 이루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일종의 “커플링” 같은 느낌의 에피소드 진행방식이랄까? “그녀가 없으니, 난 정말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다. 요 8년간 나는 리츠코가 없으면 온전한 나로 생활조차 못 하게 됐구나...” 이 작품의 독특한 에피소드 진행방식은 작품의 주인공인 리츠코와 슈이치, 양쪽 모두의 내면과 감정을 독자가 동시에 경험해볼 수 있어서 아주 좋다. 연인 사이에 가끔씩 발생하는 싸움과 오해, 결혼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양쪽 부모님들과의 관계, 각자의 사회생활에서 느껴지는 서로의 존재감 등등 매우 리얼하고 소소한 “오래된 연인들”의 삶을, 읽는 이에게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면서 가슴 깊은 곳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1화와 2화의 중간에 작가가 편집자와 이 작품을 기획할 때의 에피소드를 4컷 만화의 형식으로 풀어낸 것이 있는데, 처음에 “동거생활”이라는 소재를 작가가 제안했을 때 편집자는 “주인공을 남자와 여자 중 어느 쪽으로 할 것이냐?”고 물었고, 작가는 별 생각 없이 대충 “상황 봐서 주인공을 남자로도 쓰고 여자로도 쓸 생각이다. 가끔은 한 가지 이야기를 두 사람 시점에서 그려도 되고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어찌 이야기가 흘러서 “남녀의 시점을 모두 읽을 수 있는 만화”라는 것이 세일즈 포인트가 되는 바람에 지금 같은 형식의 “한 가지 이야기를 두 사람의 시점에서 그려내는 다중시점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매월 잡지에 연재할 때 남자 편과 여자 편을 세트로 싣게 되어 매달 40p의 분량을 그리게 되었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다. “리츠코가 있기에 온전한 내가 될 수 있다.” “먹고 자는 두 사람 함께 사는 두 사람”은 현재(2013.12.) 정식 한국어판으로는 1권밖에 출간되지 않았다. 1권에 수록된 다섯 개의 에피소드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제 3화 “고향집에 다녀올게”가 가장 좋았고, 특히나 마음에 와 닿았다. 사실 “혼전 동거”라는 소재는 남녀 주인공 둘 사이의 감정에만 집착하면 독자들이 금방 질려버릴 위험이 높은, 상업만화로서는 매우 흔하고 진부한 소재일 수 있다. 하지만, 삶이란 사실 흔하고 진부한 것이다. 먹고, 자고, 싸우고, 화해하고, 일하면서 다들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진실 아니던가. 이 작품이 좋았던 이유는 이야기의 재미나 감동을 위해 일부러 과장하거나 상황을 꼬아버리려 하지 않고 아주 리얼하고 소소하게, 시종일관 따뜻한 시선을 유지한 채 리츠코와 슈이치의 동거생활을 담담하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만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