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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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뢰진 디아블로

“그 녀석은 실명했기 때문에 지금 평온하게 살 수 있는 거라고. 너도 지지해줬잖아. 게다가...만약 한쪽 눈을 이식한다 해도 시력은 0.1 정도밖에 안 돼. 그런 상태로 이이다를 세상에 풀어놓겠다고? 목숨은 보장할 수 없어.” 이이다 쿄야가 돌아왔다. “지뢰진”이...

2013-12-20 김진수
“그 녀석은 실명했기 때문에 지금 평온하게 살 수 있는 거라고. 너도 지지해줬잖아. 게다가...만약 한쪽 눈을 이식한다 해도 시력은 0.1 정도밖에 안 돼. 그런 상태로 이이다를 세상에 풀어놓겠다고? 목숨은 보장할 수 없어.” 이이다 쿄야가 돌아왔다. “지뢰진”이 총 19권으로 완결되었던 것이 2000년 무렵으로 기억하니까 거의 13년 만에 한국의 팬들에게 다시 돌아온 셈이다. 현재(2013.11) 서울문화사를 통해 3권까지 한국어판으로 정발된 “지뢰진 디아블로”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뢰진”의 ‘속편’이나 ‘시즌 2’라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외전(外傳)’의 느낌이 더 강한 것 같다. “왜...날 불러내는 거야?” “지뢰진” 외에도 “폭음열도”, “사도”, “스카이 하이”, “철완소녀”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한 타카하시 츠토무는, 스타일리쉬한 작화와 하드보일드한 스토리 안에 묵직하고 음울한 느낌의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아 읽는 이에게 던져줌으로써, 일본을 넘어 한국에도 거대한 마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는 인기 만화가다. “지뢰진”은, 그런 타카하시 츠토무의 출세작이자 작가로서의 원점과도 같은 작품으로, 그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느낌의 “강력계 형사”가 등장하는, 불세출의 캐릭터 “이이다 쿄야”를 탄생시킨 만화다. 혹시라도 “이이다 쿄야”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이다 쿄야”는 “지뢰진”의 주인공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강력계 형사다. 이이다 쿄야라는 캐릭터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범죄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범죄자를 대하는(또는 처리하는), 마치 절대 악(惡)에 대항하는 필요악(必要惡) 같은 존재랄까? 어쨌든 1권부터 19권 완결에 이르기까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일관된 태도로 냉혹한 카리스마를 분출하는, 어떤 사건이 벌어져도 일말의 감정조차 드러내지 않는 캐릭터다. “당신은 배신하지 않아요. 앞으로 제 한쪽 눈을 이식받아 똑같은 걸 보게 될 테니까.” 어쨌든 간에, “지뢰진”의 2부에 해당하는 “지뢰진 디아블로”가 2008년 11월부터 코단샤의 만화잡지 ‘굿애프터눈’에서 연재가 시작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에 한국의 많은 팬들은 하루 빨리 십년만의 이이다 쿄야를 만나고 싶어서 정식 한국어판이 정발되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그리고 일본에서 연재가 시작된 지 5년 만에(2013.01.) 드디어 서울문화사를 통해 “지뢰진 디아블로”의 정식 한국어판 1권이 출간되었다. 전작인 “지뢰진”에서는 옴니버스 형식의 구성을 통해 여러 개의 다양한 사건을 다루는 반면, “지뢰진 디아블로”에서는 총 3권에 걸쳐 단 한 가지의 사건만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전편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이다 쿄야가 더 이상 ‘강력계 형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사건...한쪽 눈만으로 충분할까?” 앞서 얘기한 것처럼 “지뢰진 디아블로”의 시작은 다소 충격적이다. 일단 주인공인 이이다 쿄야는 더 이상 형사가 아니며, ‘원추각막’이 손상되어 두 눈의 시력을 잃고 실명한 상태다. 그래서 아무도 접촉하지 않고 조용히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이이다 쿄야의 곁에는 전편에서 소녀로 등장했던 코이케 아야가 매력적인 여인으로 변해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그를 돌보고 있고, 새로운 사건을 들고 어렵게 수소문해 이이다 쿄야를 찾아온 새로운 등장인물, 이시카와 현경의 형사 코구레 타이치가 ‘수사 협조의 대가’로 자신의 한쪽 눈을 통째로 기증하면서, 안구이식수술을 통해 이이다 쿄야가 부활하게 된다. “레나. 조국과 호적을 잃은 우리에게 넌 삶의 원동력이다. 네가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버릴게.” “지뢰진 디아블로” 1~3권은 “로스트 아일랜드”라는 단 하나의 에피소드로 진행되고 있다. “로스트 아일랜드”는 이이다 코야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코구레가 자신의 한쪽 눈을 ‘협조의 대가’로 지불할 만큼 ‘거대한 사건’이기도 하다. 북한과 일본의 ‘암묵적인 거래’가 진행되고 있던 ‘아마쿠라’라는 작은 섬에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살포되면서 단 4명만 남기고 섬 주민이 몰살된다. 섬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일본 정부에 구조를 요청했지만, 판데믹(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을 두려워한 일본 정부는 섬 주민들의 구조요청을 묵살하고 통신마저 차단해버린다. 생존자는 어린 소녀 한 명과 남자 셋, 그들 중 북한의 통일작전부 소속으로서 섬에 위장잠입 해있었던 특수요원 박태현은 북한의 잠수함을 이용, 섬을 탈출한다. 1년 후, 박태현과 섬의 생존자 셋은 자신들을 ‘국익에 반한다’는 이유로 버린, 북한과 일본 양쪽 정부에 ‘거대한 복수’를 실행하려 한다. “난 당신의 정체를 잘 모르겠네요. 정의의 사도인지 악마인지.” 그렇다. 각막을 이식받고 부활하여 다시금 손에 총을 잡은 이이다 쿄야의 첫 번째 대결 상대는 바로 북한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특수요원, 무시무시한 살인기계 박태현이다. 자신을 버린 조국에 복수를 감행하며 무시무시한 테러를 계획하는 테러리스트 박태현을 맞아 이이다 쿄야는 특유의 쿨하고 거친, 그만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난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놈들의 상담역이다.” 이 작품의 1권이 일본에서 출간되었을 때, “그림 실력은 늘었지만 매력은 줄었다”는 현지의 반응을 접하고 다소 걱정이 되었지만, 막상 한국어판을 접해보니 그간의 걱정은 기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년이 넘게 지났어도 이이다 쿄야의 카리스마는 건재했고, “지뢰진” 특유의 음울하고 세기말적인 분위기 역시 여전했다. 타카하시 츠토무의 작화는 긴 세월의 깊이만큼 훨씬 세련되어졌다. 다만 전편에서 보여주었던 압도적인 긴장감과 인간의 본질을 한 컷으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날카로움 같은 것이 잘 느껴지지 않아서 좀 아쉬웠다. 전반적인 설정도 첫 사건치고는 지나치게 거대하고 어려웠기 때문에 쉽사리 공감이 가지 않았던 점도 다소 불만이다. 하지만 이 모든 아쉬움과 불만을 감안하더라도, 이이다 쿄야가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작품의 가치는 충분하고, 전작의 팬으로서 무척이나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