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데기스
해마다 5월 5일이면 화형식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그러나 무지함의 극치였던 퍼포먼스 속에 사라진 수많은 한국의 만화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속에 불길이 치밀어 오르지만 그나마 추억의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몇몇 만화들이 아직 보존되어 있는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
2013-12-17
페니웨이
해마다 5월 5일이면 화형식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그러나 무지함의 극치였던 퍼포먼스 속에 사라진 수많은 한국의 만화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속에 불길이 치밀어 오르지만 그나마 추억의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몇몇 만화들이 아직 보존되어 있는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 중에는 걸작의 칭호가 아깝지 않을만한 작품들이 더러 있는데, 박수동 화백의 [번데기 야구단]은 명랑만화의 포맷을 끌어온 야구만화 중 단연 최고의 걸작이라 할 것이다. 물론 한국 만화계에는 이보다 더 유명하고 많은 사랑을 받은 야구만화들이 있다. 이상무의 독고탁 시리즈나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허영만의 [제7구단]같은 작품들은 극화체로 전개되는 드라마에 무게를 두어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로까지 진출했다. 어쩌면 요즘 세대의 젊은이들에겐 이러한 우리나라의 야구만화보다는 아다치 미츠루의 [H2]나 히구치 아사의 [크게 휘두르며], 미츠다 타쿠야의 [메이저] 같은 일본 만화들이 더 친숙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야구만화의 홍수 속에서도 유독 [번데기 야구단]은 해학과 유머, 그리고 감동의 코드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행사해 왔다. 이것이 야구다! 아마 [번데기 야구단]을 탐독했던 애독자라면 이 통쾌한 명대사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오합지졸의 조그만 동네 야구단이 국내 리틀야구 리그를 재패하고, 일본에 원정가서 한일전을 승리로 장식한 뒤 대만야구까지 정복하는 일련의 성장과정을 통해 가난하지만 근성있는 서민들의 애환과 삶을 대변하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던 그 순간의 정점에 섰던 바로 그 대사다. [번데기 야구단]이 나온것이 1979년이니 벌써 34년이나 지났다. 지난 2009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는 대단히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대한민국 명작만화 리메이크 사업의 일환으로 ‘번데기야구단’이 리메이크 [번데기스]를 선보였던 것이다. 「B급 상영관」 「돌아온 조단」 「스포툰」 「곰선생의 고만해」 「귀신장군 무동이」 [돌아온 조단] 등을 집필한 바 있는 만화작가 김경호가 펜을 잡은 [번데기스]는 30년전 동네 야구단의 전설로 남았던 번데기 야구단의 후일담을 담아 많은 올드팬들의 기대를 모았다. 리틀 야구 ‘번데기 야구단’이 해체된 지 30여 년이 지난 2010년.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야구단원들은 이제는 그만한 나이의 자식을 둔 사십대의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만화의 캐릭터들은 지극히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 성공한 축에 드는 인물들도 많지 않다. 그나마 어릴적 친구들의 도움에 자라서 꼭 훌륭한 인물이 되겠다던 물꽁은 선생님이 되었고, 버들피리는 건물주가 되었다. 마이크는 홈쇼핑 쇼호스트로 장대는 화훼기능사가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번데기야구단의 주역 뻔은 빚에 쫓겨 노숙자가 되었다. 그들은 꿈 많았던 초등학생들은 반짝이는 한없이 해맑던 어린 시절을 지나 현실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우리시대의 사십대가 된 것이다. 성인이 된 번데기 야구단원들이 다시 모여 프로야구로 진출하는 스토리 자체는 분명 신선한 감이 있다. 원작이 학업과 가난한 집안 형편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애환을 동시에 담아냈다면, [번데기스]는 이미 현실에 부딪혀야 하는 더 이상은 어디에도 보호받을 수 없는 성인이 된 아이들의 또다른 현실적 고충을 충실히 반영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고인돌의 박수동 화백이 그린 ‘번데기 야구단’은 어린이들이 야구를 통해 우정을 배우며 성장해가는 모습을 그린 추억 속 최고의 명랑 만화이다. 1970년대 초등학생들의 우정, 모험, 꿈이 어우러진 걸작이다. 지금의 삼사십대가 어린 시절 읽었던 최고의 만화로 이 만화를 꼽는 건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번데기스]는 아이디어만 좋았던 실패작이다. 원작의 개성있는 캐릭터들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평면적인 이야기들, 무의미한 원작의 오마주와 재탕을 거듭하며 네이버 웹툰으로 연재내내 악플에 시달리며 별다른 화제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종결되고 말았다. 리메이크라는 기획 자체가 어느 정도 원작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독자층에 한정된다는 특수성과 원작과의 비교대상에 오를 수 밖에 없는 선천적인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번데기스]는 원작의 촘촘하게 짜여진 에피소드와 정겨운 서민 삶의 현장감을 포착하는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리메이크와 후일담이라는 허울좋은 구실로 삼아 그저 흉내만 내고 있을 뿐이다. 애초에 만화원작의 가치를 높히고 캐릭터 시장의 활성화를 유도한다는 의도로 계획된 명작만화 리메이크 사업의 다른 작품들인 [번개기동대 2009], [로봇빠찌], [진진돌이 에볼루션]도 마찬가지로 구관이 명관이라는 진리를 확신시켜 주며 좋은 반응을 얻는데는 실패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아쉬운 일이다. 웹툰이라는 신세대 포맷을 통해 지나간 걸작들을 복기한다는 구상 자체는 과거의 문화유산 보존에 취약한 한국 컨텐츠 시장의 특성상 매우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실패의 원인에 대해 웹툰이라는 매체 자체가 리메이크 작품을 기대하는 독자층과 맞지 않는 것이 아니었나 하는 만화 전문가의 분석도 읽은 적이 있지만 어찌되었건 줄줄이 실패한 리메이크 만화의 사례는 원작의 공감대를 얻어낼만한 요소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는 뜻이리라. 어찌되었건 팬의 입장으로 바라는 건 리메이크 보다는 미처 다 복원되지 못한 고전 걸작들의 귀환이 더 절실하다는 것이며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지속적인 시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