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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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전날 (The Wedding Eve)

결혼식과 장례식은 기쁜 날과 슬픈 날이라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지만 평소 왕래가 뜸했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명분을 마련해 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결혼식은 현세에서 새로운 출발을 위한 의식이며 장례식은 내세적 관점에서 새로운 출발을 상징하는 의식이라는 ...

2013-12-11 황민호
결혼식과 장례식은 기쁜 날과 슬픈 날이라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지만 평소 왕래가 뜸했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명분을 마련해 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결혼식은 현세에서 새로운 출발을 위한 의식이며 장례식은 내세적 관점에서 새로운 출발을 상징하는 의식이라는 차이점이 있지만 둘 다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삶을 찾아간다는 공통점도 있다. 결국 결혼과 장례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통과의례이며 인생을 통해 가장 행복하고 경건하며 혹은 가장 비통하고 엄숙한 감정이 집약되어 나타나는 순간이다. 일본의 신인작가 호즈미의 <결혼식 전날>은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인 결혼과 장례(죽음)의 모티브를 통해 여러 유형의 삶의 단면을 담담하게 응시한 작품이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는 <결혼식 전날>은 어느 작품이든 앞에서 말한 결혼과 장례(죽음)가 늘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우리 삶이 늘 죽음의 경계에 서있는 것임을 일깨워 주기라도 하듯이 죽음의 설정은 이 작품에서 자연스럽고 중요하다. 그렇다고 철학적 고뇌를 떠올릴 정도로 심각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수채화 같이 맑은 느낌의 사연들이 쉽게 읽히는 편이며 반전의 재미도 있다. 작가가 의도 했건 의도 하지 않았건 매 작품에는 두 등장인물의 심리적 갈등이 물흐르듯 막힘없는 설전으로 표출되는 것도 재미있다. 일테면 여덟 살 터울의 누나와 남동생, 아빠와 일곱 살 딸, 초로의 쌍둥이 형제, 고독한 소설가와 당돌한 여중생, 심지어 무뚝뚝한 남자와 그가 기르는 고양이 등이 주고받는 대화나 독백은 배틀 수준이다. 표제 작품인 ‘결혼식 전날’ 은 그야말로 결혼식을 하루 앞 둔 커플의 묘한 긴장감과 불안의 감정들로 시작되는데 열 한 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남자의 회한과 그런 남동생을 키워준 누나의 연민이 말할 수 없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작품 초반의 분위기와는 달리 커플의 관계가 결혼을 앞 둔 당사자들이 아니었다는 반전이 여운을 남긴다. ‘아즈사 2호로 재회’ 는 일 년에 한 번 오봉 때만 만나는 아즈사와 아빠의 사연이 눈물겨운 판타지 휴먼드라마이다. 이미 사망한 아빠가 아즈사를 찾아오는 설정은 흡사 이치가와 다쿠지의 소설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연상시킨다. 비의 계절에 돌아온다는 약속대로 1년 후에 나타난 미오는 생전의 기억을 모두 잃은 상태였지만 아즈사의 아빠는 생전의 기억을 또렷이 갖고 있다. 아빠와 일곱 살 딸이 주고 받는 대화와 서로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감정의 표현들이 가슴 아프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떠난,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들의 상실감과 슬픔은 불가능한 상상을 낳고 그 상상은 때론 믿을 수 없는 현실의 기적을 만들기도 한다. 꿈인듯 현실인듯. ‘모노크롬 형제’ 에서는 10년간 소원했던 쌍둥이형제 시로와 로쿠로가 동창생인 유키코의 장례식에서 만난다.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당사자를 중심으로 유대감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일시적 공동체이기에 더러 반목과 질시의 시간들을 극복하고 화해와 용서의 순간이 만들어 지기도 한다. 시로와 로쿠로도 그랬다. 유키코의 연애상대를 두고 티격태격 옛추억을 되새기던 형제는 그날 밤 술을 진탕 마시고 정신없이 취한다. 그날 이후 로쿠코는 건강검진에서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하루가 다르게 몸상태가 나빠져 결국 유키코의 장례를 치른지 4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서 미련없이 세상을 떠난다. 미련없는 죽음. 시로는 슬픔에 젖어 자조한다. 유키코가 좋아한 상대는 자신이 아니라 로쿠코였고 그래서 로쿠코가 먼저 유키코 곁으로 간 것이며 그때나 이제나 자신은 지지리도 한심한 들러리였다는 것을.. 사랑하는 친구와 쌍둥이동생의 연이은 죽음 앞에서 초로의 남자는 때로 이처럼 나약하고 초라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꿈꾸는 허수아비’ 는 여동생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캔자스를 찾아가는 뉴욕 남자의 이야기이다. 잭과 베티 남매 역시 어려서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베트남에서 전사하면서 일찌감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다. 새로운 남자가 생긴 어머니는 어린 두 남매를 캔자스에서 농장을 하는 큰아버지 부부에게 맡긴다. 사촌들의 학대와 어른들의 냉대 속에서 두 남매가 맘 편히 있을 곳은 베티가 진짜엄마 대신 엄마라고 부르는 허수아비가 서있는 밀밭뿐이었다. 베티에게 가족은 자신뿐이라고 믿는 잭은 베티를 과잉보호하고 결국 사람들에게 변태같은 여동생 스토커라는 소리를 듣게 되자 베티의 곁을 떠난다. 뉴욕의 작은 라디오방송국에 일자리를 얻은 잭은 10년만에 베티의 결혼소식 엽서를 받고 고민 끝에 캔자스를 찾게된다. 큰아버지 부부는 냉정했던 예전과 다르게 온화해진 모습이어서 반감을 갖고 있던 잭은 적잖이 놀란다. 장례식에서 쌍둥이 형제의 소원한 관계가 해소되었던 것처럼 결혼식장에서 해후한 잭과 큰아버지 부부의 반목 역시 화해모드로 전환된다. 베티의 부탁으로 밀밭의 허수아비를 데려와 베티의 결혼식을 보여 주던 잭에게 다음은 네 차례야 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결혼식이 끝나고 뉴욕으로 돌아가는 잭에게 두 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베티의 결혼소식엽서를 보낸 건 대체 누구였는지, 과연 허수아비의 속삭임은 단순한 환청이었는지... 어른이 되어서도 허수아비를 엄마라고 불러온 베티의 염원이 기적을 낳은 것일까.. ‘10월의 모형 정원’은 수록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은 상념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원통하게 죽은 외롭고 쓸쓸한 까마귀가 한 소녀에게 빙의해서 고독한 소설가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내용이다. 삶 자체가 무기력한 소설가 카즈는 자신에게 맡겨진 당돌한 소녀와 티격태격하며 지내던 중 우연히 동네에서 발생한 여중생 유괴사건 전단지를 보고 놀란다. 까마귀가 빙의 된 소녀는 바로 동네에서 유괴되어 실종된 여중생 유코였다. 고독하게 죽고 싶지 않았던 까마귀는 창문을 통해 항상 자신을 지켜보던 고독한 소설가에게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자기 앞을 지나다니던 소녀로 빙의 한 것이다. 그 마지막 말은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 보다 먼저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돼.’ 그리고 소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카즈는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같이 살았던 소녀에 대한 이별의 선물로.. ‘그후’ 는 변화무쌍한 인간의 감정을 비웃는 고양이가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주인 토시아키가 집을 비운 사이 누나가 구급차에 실려 갔다는 자동응답기 메시지를 들은 고양이는 주인에게 전화메시지를 듣게 해주려고 애쓴다. 누나한테 큰일이 난 줄도 모르고 태평한 주인이 안쓰럽기만 한데 전화벨이 다시 울리면서 반전이 이루어진다. 그 반전을 맞는 고양이의 표정과 동작 시퀀스가 걸작이다. 이어지는 고양이의 독백은 이 만화의 주제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내겐 죽든 태어나든 별 차이 없다. 자연의 이치일 뿐이니까’ 이 만화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작가는 인생의 새로운 출발인 결혼, 죽음, 생명의 탄생 등 일련의 인간사를 맞이한 사람들의 다양한 대처 방식을 통해 삶과 죽음이란 결국 자연의 이치이며 인간은 그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각시켜준다. 결코 무겁지 않은,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이 만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까마귀의 전언과 고양이의 독백이다. 재미있는 것은 작가가 이 메시지를 사람이 아닌 동물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그랬을까?